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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라면 장현2리 울띠, 우수고개 편
우리 마을이야기8)
2006년 10월 23일 (월) 00:00:00 보령신문 webmaster@charmnews.co.kr

   
▲ 명대 저수지에서 본 울띠 마을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씨의 고향 울띠

장현 2리는 명대계곡이 있는 오서산(烏捿山)자락에 위치한 마을로서 장현 저수지에서 서남쪽의 울띠가 1반, 우수고개가 2반이고 남동쪽의 터골이 3반이다. 4반은 북쪽 위에 있는 금자동까지로 지금은 통틀어 명대라고 한다. 이는 버스에서 표시하기를 명대라 하기에 이름들이 급속히 잊혀져가고 있는 것 같다. 그 가운데 울띠는 50여 가호가 사는 중심 마을로서 마을회관이 있고 집들도 현대식 전원주택으로 예쁘게 지은 집이 대부분으로 비교적 넉넉하게 사는 부촌이다.

특히 이 울띠는 소설가 김성동 씨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영화「만다라」의 원작이 된 소설「만다라」작가인 김성동 씨는 육이오사변이 일어나기 전 해에 이곳에서 태어났다. 인텔리이자 마르크시스트였던 그의 부친은 해방직후 좌익정당의 간부직을 맡아 일하면서 마르크시즘의 이상을 지상에 실현하려니 현실과의 괴리가 너무 심해 고민해왔다. 결국 정치단체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인간적인 수법에 회의를 느끼고 이곳 울띠로 내려와서 평범한 서생으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아들 김성동 씨가 태어나기 직전인 어느 날 갑자기 경찰에 연행되었고 할아버지의 구명운동 마저 허사로 몇 년의 구형을 받았다. 실형에서 집행유예의 판결을 기대하며 기다리던 중 육이오사변이 터졌고 아버지는 다른 좌익사범들과 함께 삼십을 조금 넘긴 나이로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말았다. 자식을 구명하려던 할아버지마저 화병으로 사망하고 유복자나 다름없이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작가는 어머니와 함께 이 울띠를 울면서 떠나야 했다고 한 노인이 전한다.

두꺼비 바위와 우수고개

   
▲ 두꺼비 바위
울띠 윗마을이 우수고개이고 울띠와 우수고개 사이가 원터인데「호서읍지(湖西邑誌)」에 “우수현원 좌현동인칠리 금무(禹水峴院 佐縣東人七里 今無)”라고 표기되어 있어 옛날에 우수현원이 있던 것으로 추측되는 곳이다.

원터에서 우수고개로 오를 목에 마을 주민들이 모두 땀을 흘리며 타작하고 벼 말리느라고 바쁘다. 탑세기 이는 속으로 부진부진 들어가 말을 붙여 묻기엔 송구하고 조심스러워 그냥 지나쳤다. 우수고개를 지나다 보니 길가의 어느 집 바깥마당에 콩을 널어놓고 타작하는 이들이 보였다. 마을에 대해 이야기라도 들어볼 양으로 다가가자 대문 앞에 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놓여 있다. 바위의 생김새가 영락없이 복 두꺼비를 꼭 닮았다. 농촌 마을 대부분 노인이 많듯 이 집도 팔순이 넘게 보이는 노부부가 살고 있는데 그 딸이 잠시 일을 도우려고 와 있었다.

“여기가 우수고개라는 곳인가요?”

“맞어유, 요 아랜 울띠구 요긴 우수고개유. 근디 뭣때미 물으셔유?”

바깥노인에게 말을 걸었는데 노인은 대답을 피해 들어가고 안노인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궁여지책으로 마을 이름들이 참 재미있다는 말을 던지자 듣다 못했던지 일을 거들고 있던 딸이 나서며 말을 받아주었다.

“그러잖아두 우리 어려선 울띠 애들허구 마을 이름 가지구 서로 놀려대며 싸웠슈.”

“뭐라고 놀려요?”

“걔덜이 먼저 우덜보구 우수고개서 사는 우순 애덜이라구 놀리먼 우덜은 울띠서 사는 울보덜이 까분다구 맞받어쳤지유. 근디 지금은 울띠구 우수고개구간이 몽땅 명대라구 불러유.”

올 가을에는 날이 가물어 콩 농사가 시원치 않다던데 이 집은 노란 종콩알이 옹골차게 잘돼보였다.

살아 움직일 것 같은 바위가 자꾸 눈에 들어온다.

“저 바위가 영락없이 두꺼비 같네요.”

“두꺼비바위 맞어유. 우리집이 복을 가져다 줬을 거라구들 그러는디.....시방 이날 이때까장 가족들 암 탈 읍시건강허게 잘 사니께 그 말이 맞는지두 물러유.”

안노인(89)이 두드린 콩대를 걷어 묶으며 두꺼비 바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서도 바위 덕으로 믿는 듯했다. 주인인 바깥노인(87)은 육이오 당시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 강원도로 피난해 살다가 자신의 형이 살고 있는 이 우수고개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맨몸으로 들어온 노부부는 갖은고생 다 겪으며 살았다. 40여 년 전 바위투성이인 밭을 샀는데 그 밭이 바로 이 집터가 되었고 당시 밭 한가운데 두꺼비를 닮은 바위가 있었다. 풍수지리를 따져볼 줄 알았던 노인은 이곳에 집을 지었고 그 뒤로 가세가 차츰 나아졌으며 사남이녀의 자녀들도 모두 건강하니 더 바랄게 없다고 한다.

“근강두 좋은 것두 복이지먼 우리 육남매 중 셋씩이나 서울대 나온 것두 예삿일이 아니쥬.”

콩을 쓸어 담던 딸이 노모의 조심스러운 말을 보충하며 친정집의 복 받은 이야기를 강조했다. 교수, 박사, 회사간부, 등등 잘 된 자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한 번 바위를 보니 충분히 그럴듯한 생김새다. 마을 사람이야기로는 두꺼비 바위가 그 집 뒤쪽에도 하나 더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없어졌다고 한다.

이산광의 귀학정과 육송수

   
▲ 귀학정의 육송
우수고개는 거슬러 올라가 벌뜸과 장승개를 지나 청양군 화성으로 너머 가는 고갯마루까지도 우수고개다. 장승개는 육송수(六松樹)가 있는 곳으로 예전엔 장승들이 늘어서 있어서 장승개밭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 장승개는 조선 광해군 때 정치에 회의를 느낀 동계(東溪)이산광(李山光 1530~1624 토정(土亭) 이지함의 조카)이 낙향하여 학이 많이 날아오르는 풍광이 좋아 정자를 지어 놓고 귀학정(歸鶴亭)이라 하고 찾아오는 선비들과 글을 나누며 지낸 곳이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마을에 들어온 동계 이산광은 그냥 평범하게 밭이나 매며 지내고 있었기에 처음엔 마을 사람들이 동계를 타지에서 온 떠돌이쯤으로 업신여겼다. 어느 날 동계가 이 장승개 밭에서 밭을 매고 있는데 충청감사가 된 이산해의 아들이 지나가다가 동계를 보고 급히 가마에서 내려와 인사하니 그제야 마을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동계의 집안을 알아주게 되었고 겸손했던 그가 큰 인물임을 알고 모두 그를 존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동계는 당시 영의정이었던 그의 형 이산해(李山海)와 나라에서 여러 차례나 내리는 벼슬을 모두 마다하고 이곳에 은거하며 시와 글을 지었고 후진을 양성하며 지냈다. 그 후 이산광의 6대손인 이실(李實1777~1841)이 이곳에 소나무를 심었는데 여섯 줄기로 뻗어 올라가다 가운데 가지가 말라 죽더니 곁에서 다시 한그루가 자라 지금의 육송수가 되었다고 한다. 육송수는 높이가 약 20m에 그 둘레가 180cm나 되며 풍모가 가히 영의정감이라 할 만큼 진귀하다.

금자동의 굴바위

다시 길을 돌려 장현리에서도 가장 윗마을인 금자동으로 올라갔다. 오서산 중턱에 자리한 금자동은 천축암(天竺庵)이 있는 곳으로 10여가호가 살았던 옛날엔 오솔길이었지만 최근에 휴양 시설이 들어서며 자동차가 올라가기 좋은 포장길이 나 있으나 천축암과 민가 한 채만 남아있다.

금자동의 서쪽으로 올라가면 월정사가 있고 그 뒤쪽으로 더 올라가면 한내의 발원지의 하나인 굴바위가 있다. 그 굴바위는 예로부터 토속신앙인들의 영험한 곳으로 소문이 나서 많은 이들이 치성드리며 기도하는 장소다. 일제 때 음현리에 살았다는 어느 한 아낙은 일제징용으로 끌려 간 큰아들의 무사귀환을 위해 새벽마다 찾아와 냉수에 목욕하고 치성을 드렸다. 그래서 인지 큰 아들은 육이오사변까지 무사히 넘겼다. 그러나 혹독한 고생을 해선지 결혼을 한지 8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어서 고민이었다. 여러 방책을 다 써보고 서울에서 좋다는 것을 다 먹어 봐도 소용없어 고민하던 며느리는 안 보던 점까지 보게 되었다.

“댁의 시어머니가 기도한 곳에 가서 백일기도를 하면 이내 아이가 있을 거요”

점쟁이의 말을 믿고 백일기도를 하러 이곳 시댁으로 내려왔고 시어머니처럼 새벽마다 굴바위에 가서 기도를 했는데 마지막 날이 되도록 아무 기척이 없었다. 실망하고 서울로 올라가는데 기차 안에서부터 속이 메스껍더니 그날로 아기가 있어서 딸을 낳았고 그 뒤로 두 아들을 더 낳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일제시대 당시 새벽에 기도하러 가는 어머니를 따라 굴바위까지 가보았다는 아낙의 작은 아들이 이 금자동에 살고 있다.

굴바위까지 차로 올라가려 했으나 차단기로 막혀 있고 길이 험해 되돌려 내려오는데 수십 명의 여자 등산객들이 올라가고 있다. 등산객들은 겸손히 산에 기도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산을 감히 정복해보겠다고 오르는 것이리라. 이른 새벽마다 기도하러 가던 발걸음보다는 훨씬 더 무겁고도 숨 가쁘게 땀을 흘려야 꼭대기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시민기자 안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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