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는 라캉과 더불어 타자를 주체 구성에서 중요한 계기로 생각했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사유’만이 진정한 주체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했다. ‘타인’은 결코 ‘나’로 환원될 수 없는 사람이다. 때문에 주체의 주체성, 즉 주체가 주체로 자신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조건을 이론적 활동이나 기술적, 실천적 활동에서 찾기보다는 오히려 타인과의 윤리적 관계를 통해서 찾는다.

무엇보다도 서양 철학은 ‘존재론’이 중심이다. 인간의 인격성을 상대화하는 경향이다. 레비나스는 그의 후기 철학에서 발전시킨 주체성의 의미, 즉 ‘수동성보다도 더 수동적인’ 주체, 타인의 짐을 대신 질 수 있는 책임적인 주체를 하이데거의 ‘개방성’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제안한다. 이런 의미에서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 타인을 위해 책임질 수 있다는 것, 타인을 대신해서 고통 받을 수 있다는 ‘주체성의 의미’를 내세운다. 주체성의 인격에는 그 어떤 무엇으로도 환원할 수 없고, 소외시킬 수 없는 고유성과 존엄성이 있다. 바로 타인의 얼굴이다. 얼굴은 현실 가운데서 특이한 현상이다. 얼굴은 코와 입, 두 눈의 집합이 아니다. 얼굴을 통해서 존재가 형식에 갇혀 있지 않고, 열려 있음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보여준다. 얼굴은 직설법이 아니라 명령법으로, 한 존재가 우리와 접촉하는 방식이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통해 ‘타자의 윤리’를 내세우는데, 특히 고통에 대한 해석은 그의 철학의 위대성을 보여준다. 아픔과 고통은 도처에 존재한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불안과 슬픔, 고통과 비애가 있다. 이에 대하여 우리의 지식이 왜곡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슬픔과 고통이 왜곡되어 있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 삶에는 고통보다는 쾌락이, 슬픔보다는 기쁨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사랑과 아름다움과 기쁨을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계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고통에 대한 반응은 가장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외침과 신음’이다. 외침은 자기표현이면서도 구조에 대한 요청이기도 하다. 레비나스는 고통이 없이는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진정한 의미의 주체는 타인에 대해 열려 있고, 타인을 위해 고통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미국 철학자 윌터스토프는 아들의 죽음에 통곡하면서 “고통의 골짜기에는 절망과 쓰라림이 제조된다. 그러나 또한 품격도 제조된다. 고통의 골짜기는 영혼을 빚어내는 계곡이다”라고 말한다. 고통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과학과 예술, 학문과 종교에서 어떠한 성취도 이룰 수 없다. 고통은 ‘수용성보다 더 수동적인 수동성이다’. 칸트에 의하면 수용성으로서의 감성은 이미 주체의 활동이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의 감성은 수용성으로서의 감성보다 더 깊은, 아무런 방어나 보호 없이 상처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에서의 감성이다. 레비나스의 타자의 사유는 ‘얼굴의 사유’ ‘얼굴의 철학’이다. 그 동안 서양철학은 존재론이 주 관심사였다. 이것은 후설에 의하면 현상학이고, 레비나스에 의하면 의식의 본질을 향한 지향성이다. 지향성은 의식의 ‘속성’이 아닌 실체성이다. 의식은 지향성으로 존재한다. 의식의 지향성은 곧 성향이며, 관념론으로 보았던 생각의 편향을 명사에서 동사의 관념으로 바꾸어 생각하게 해주는 동적 성향이다. 이 움직임은 들뢰즈에 의하면 노마드적 사유인데,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을 통해 깊은 사유가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고, 타인의 얼굴을 통해 천의 고원을 넘나든다. 타인의 얼굴! 이는 곧 내 얼굴이며, 나를 향한 가로지르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