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겐들 고향이 정겹지 않을까마는, 오늘 따라 내 기억 속의 고향은 각별하게 다가온다. 고향에서 옛 친구가 찾아와 가을 밤에 마주 앉으니 오백 리 고향 길이 눈앞에 어린다.

황해 바다 가까이에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 보령시 내항동이라는 행정지명보다는 옛날부터 불려오는 ‘안뜸’과 ‘웃뜸’이란 이름에 가슴이 뛰고 이 마을을 품에 안고 있는 ‘소래’라 불리는 이름이 더 정겨운 내 고향이다.

대천 시내에서 해수욕장 쪽으로 3킬로미터쯤 떨어진 대로변에 낮은 산들이 있고 그 아래 웃뜸마을이 있다. 여기서 한 이백 미터 걸어가면 내가 나고 자란 안뜸마을이다. 안뜸의 뒷산에는 소나무가 지천이었고, 웃뜸 뒷산에는 상수리나무가 유독 많았다. 상수리나무의 진을 먹고 사는 하늘소도 많아서 어린 시절 집게벌레 잡이에 하루 해가 긴 줄 몰랐다. 모두 합쳐 봐야 고작 스물댓 가구 남짓한 두 마을을 야트막한 야산이 둘러싸고, 남쪽으로는 조금 높은 건지산이 받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더 한적하고 고즈넉한, 그야말로 전형적인 시골 마을의 풍경이었다.

우리집은 대대로 살아온 이백 년 된 고택으로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었다. 할머니가 공들여 기름을 먹이곤 해서인지 유난히도 새까맣고 반들반들한 대들보며 서까래가 인상적이었다. 해마다 봄이면 제비들이 찾아와 처마에 집을 짓고 새끼를 치며 일가를 이루었고, 가을이면 강남으로 날아갔다가 이듬해 봄이면 어김없이 다시 찾아오곤 했다.

아버지는 유난히도 꽃을 좋아하셨다. 꽃 사는 일이 드물었던 그 시절에도 봄만 되면 아버지는 꽃나무를 사 나르셔서 뒤뜰에는 꽃이 많았다. 나무 심는 법과 기르는 법까지 자분자분 설명해 주실 때면 어린 마음에 아버지는 세상의 어떤 꽃보다 아름다운 모습이셨다. 새하얀 함박꽃이며 해당화, 목련, 매화 등속의 꽃들이 울긋불긋 피어난 뒤뜰은 언제 봐도 장관이었다.

어머니가 상수리묵을 쑤시던 광경 또한 지금도 아련한 추억 속의 그림이다. 내 고향 대천의 가을은 상수리의 계절이었다. 멀리 차령 산맥 막바지에 솟아오른 성주산을 물론이고 건지산을 거쳐 건너편 웃뜸 마을 야트막한 산까지도 상수리나무가 지천이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상수리묵은 별식 중의 별식이었다.

상수리가 익어서 떨어지기 시작하는 9월 말부터 우리 다섯 형제는 시간만 나면 부지런히 상수리를 주우러 다녔다. 잘 여물어 떨어진 상수리를 줍는 재미가 워낙 쏠쏠해서 거기 정신이 팔리다 보면 하루해는 저물고 허리가 아파 오곤 했다. 금방 떨어져 꼭지가 하얀 신선한 상수리를 주울 때는 기분이 상쾌했고 여러날 동안 가랑잎에 덮여 있다가 습기를 잔뜩 머금은 상수리를 보아도 가슴이 설렜다.

하나라도 더 많은 상수리를 주우려고 이른 아침부터 산을 뒤지며 몰려다니는 것이 우리들의 일과였다. 상수리로 하는 구슬치기와 비슷한 ‘상수리치기’는 가을날의 재미난 놀이였다. 내기도 내기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에게 더 많은 상수리를 가져가려는 형제간의 무언의 경쟁이었지 싶다.

상수리를 절구로 찧어 껍질을 깨 내는 것이 묵을 내는 첫 과정이다. 체를 쳐서 껍질을 날린 후 알맹이만 그릇에 담아 물을 붓고 떫은 맛이 완전히 빠질 때까지 우려낸다. 이것을 맷돌로 갈아 내어 그릇에 붓고 너무 되지도 묽지도 않게 끓여 낸 후 큰 양푼에 담아 식혀 두면 완전히 굳어 상수리묵이 완성된다.

어머니는 옆에서 지켜보는 나에게 묵 한 점 듬뿍 칼로 베어 주시곤 했다. 장독대에서 갓 퍼 온 조선간장으로 양념장을 만들어 찍어먹으면 그 감칠맛이 더할 나위 없었다. 너무 떫지도, 들척지근하지도 않고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유년의 가을 풍경 한가운데는 늘 상수리묵의 고소한 맛과 묵을 베어 주시던 어머니의 온화한 미소가 자리잡고 있다.

지금도 대천의 상수리묵은 고소하고 차지기로 유명하다. 상수리나무가 많은 신라 고찰 성주사 주변은 물론이거니와 대천 시내의 상수리묵도 다른 지방의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대천에 들러 형제들과 함께 묵을 먹을 때면 우리는 어린 시절의 추억에 젖는다. 서로 더 많이 주우려고 다투던 일, 주머니에 가득 담고 어깨 동무하고 언덕을 달리다 넘어지던 일, 그때는 옆에 있기만 해도 든든했던 형제들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맛이야 따라갈 수 없지만 묵 한 덩어리를 입 안에 듬뿍 넣어 주시던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우리도 잊지 말자고 다짐하기도 했다. 매년 대천에 내려갈 때마다 묵을 직접 쒀서 멀리까지 가지고 와 파시는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릴 적 추억처럼 골이 깊어 가는 주름살들을 보니 앞으로 상수리묵 맛을 못 보게 될 것만 같아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든다.
 퇴근길의 종로, 시끌벅적한 골목에서 친구와 함께 상수리묵을 앞에 놓고 앉았다.
 “조카 녀석들, 잘 지내나?”
 “그래. 근데 온종일 방 안에만 틀어박혀 컴퓨터 가지고 꼼짝 안하니 걱정이네. 형제도, 친구도 모르고???.”
 “우린 산을 뒤지고 다니며 상수리 따고 사슴벌레 잡으며 어린 시절 보냈는데???. 참.”
 내가 술에 약한 줄 뻔히 알면서도 친구는 막걸리 한 잔을 또 덥석 따른다.
 “상수리묵 맛도 옛날과 다르고 꽃나무 한 그루 어디다 심을 곳 없는 서울 살림이지. 안뜸마을로 언제 내려가야 할 텐데.”
 싸늘한 밤바람이 낙엽을 쓸고 내 가슴속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