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들어 기온변화에 부쩍 관심을 보여온 우리집 초등학생 녀석들 탓이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다며 나도 덩달아 부산을 떨었던 것은. 그리고 은근한 기대도 했었다. 대관령에 가득내린 눈을 영상으로 만나게 되자, ‘우리 마을에도 첫 눈이 올 때가 됐는데’ 하면서 첫 눈을 기다렸다. 기다림은 멀지 않았고 기대 만큼 눈부신 첫눈이 내렸다. 나는 새벽녘 가로등 불빛 아래로 쏟아지는 흰 눈을 보면서 뇌리를 스치는 수 많은 아름다운 만남들을 떠올려 보았다. 저렇게 맑고 깨끗하며 포근한 느낌을 내게 주었던 만남들이 지금 내게 얼마나 존재하는가. 세월을 살면서 첫 눈을 기다리듯 기다리는 만남들이 점점 희귀해져가는 세상살이가 떠오르면서 불현듯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내가 첫눈을 기다리는 사이에 우리 사회에는 새로운 그림을 꿈꾸는 정치적 움직임이 요동치고 있다. 첫눈처럼 새로운 정치를 갈망하는 국민적 여망을 따라 새로운 지형이 꿈틀거리는 것이다.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은 지난 10월 보선 이후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하더니 유승민, 원희룡, 남경필, 세 최고위원이 사퇴했다. 이어 당내를 휘감은 새로운 갈망들은 쇄신안 발표로 위기를 막아서려했던 홍준표 대표까지 끌어내렸다. 바야흐로 거대한 한나라호는 난파선이 되었고 이제 새로운 질서를 꿈꾸게 될 것이다. 야권 또한 여러 계파와 정당이 내년 총선과 대선 일정표를 놓고 이합집산을 모색하고 있다. 새롭게 만나고 또 헤어지면서 국민들을 향해 읍소할 것이다. 

보령지역 정가에도 그런 움직임이 전해진다. 무소속으로 남아 있던 김동일 전 도의원이 한나라당에 입당하는가 하면, 엄승용 전 문화재청 문화재정책국장이 민주당에 입당하고 새해를 기원하고 있다. 조각배를 출렁이게하는 파도로 끝날지 쓰나미가 되어 거대한 해일을 몰고 올지 알 수 없어도, 생활에 바쁜 서민들에게도 새로운 기다림과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작은 마을에도 총선과 대선이 연달아 기다리는 내년 정치 일정은 초유의 관심사일 터이고  그에 따라 이미 수 많은 이합집산이 진행되고 있을 터이다. 

정치란 우리네 인생처럼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영원한 동지도 없고, 영원한 적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정치 아니던가. 아니, 정치란 사람과 사람의 만남 속에서 호불호를 가르는 행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승승장구하고 결코 흔들리지 않을 듯했던 이상득 의원, 그를 향했다 해야 할 검찰의 칼끝을 보라. 국회 부의장까지 지낸 다선 의원인데다 이명박 대통령의 형이기에 수 많은 의혹 제기에도 요동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레임덕으로 들어선 것일까. 검찰은 이상득 의원의 15년 심복인 보좌관을 체포했다. 무언가 큰 파고가 밀려올 기세다. 

큰 선거철이 다가오는 이 때, 나는 작은 선거 하나를 경험했다. 남포농협 조합장 선거가 얼마 전에 있었다. 출마자는 두 명이었고 나는 그들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선거 운동이 필요했으니 어쩌겠는가. 열심히 하겠다는 전화가 왔다. 무엇을 어떻게 열심히 하겠다는 뜻인지는 몰라도 그저 ‘열심히’라는 말을 거듭 전했다. 사실상 달리 할 말도 마땅치 않았을 터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이었다. 나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이들에게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이라거나 자신과 학교 동창이라며 지지를 당부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조합장이 되어 일을 잘하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나 참으로 묘하게도 그 말에 흔들리는 듯하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이래서 선거는 조직표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후보자의 인품이나 성향에 대한 특별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무얼 기준으로 투표하란 말인가. 그러나 돌이켜 볼 때 내게도 문제가 있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선거권자로서 적극적이지 못했다.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모저모 알아봐도 될 터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래저래 우리네 선거는 조금이라도 인맥이 될 만한 사람을 찍는 일에 불과한 것이 된 것이다. 왜 그랬을까. 혹시, 보험을 들 듯이 내게 무슨 득이 될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첫눈이 소복이 내린날 아침, 우리집 아이들은 신바람이 났다. 기온이 진짜 영하로 내려갔는지 스마트폰으로 확인하는 호들갑을 떨더니 앞마당에 달려나갔다. 지난 겨울에 사용했던 털장갑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자 큰 녀석은 그냥 내달렸고, 작은 녀석은 할머니가 사용하던 목장갑을 끼고 나갔다. 잠시 후에 보니 커다란 눈덩이를 굴리고 있었다. 작은 눈덩이 하나를 또 만들고 나뭇가지를 잘라 이리저리 끼우니 영락없는 눈사람이었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사진을 찍어달란다. 어이쿠, 배터리가 방전 직전아닌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눈사람을 만들었던 우리는 사진도 못찍고 꽁꽁언 손을 부비며 집안으로 쏙 들어와야 했다. 내년에는 선거권자로서 준비된 투표도 하고,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첫눈 같은 사람을 많이 만나고 싶은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