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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이야기 (11)
남포면 신흥1리 매내·봉촌 편
2007년 01월 02일 (화) 00:00:00 보령신문 webmaster@charmnews.co.kr

꿈속의 마을로 찾아가다

탐방할 마을을 정하기 위해 자료집을 뒤적이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그럴듯한 이야기를 담고 있을만한 마을을 찾아 탐방 취재하기 위한 준비였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남포(藍浦)면의 한 마을을 찾고 있는데 누군가 옆에서 또렷한 소리로 말했다.

“그 다음 장에 나오는 마을을 이번에 해줘”

어린 아이의 목소리인데 무시하거나 거부해지지 않고 저절로 그의 말을 따라 다음 장으로 넘겨졌다. 책장을 넘겨 펼치자 널따란 땅이 나왔는데 아무 것도 없는 빈터였다.

“응 바로 거기야.”

다시 또렷하게 말해주는 어린 목소리에게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이야기 하냐?’고 물으려고 옆을 돌아보다 잠이 깨었다. 꿈이었다. 자료집을 펼쳐놓은 채 엎드려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환청을 사실처럼 생생하게 들을 정도로 정신이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하는 자괴에 빠져 맥없이 펼쳐놓은 자료집을 들여다보니 넘기다 접혀진 책장이 바로 남포면 신흥리의 지도였다. 거기에 무엇이 있을까? 꿈을 믿지는 않지만 왠지 신흥리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신안서원지가 있는 매내

신흥리는 본래 남포군 신안면에 새로 이룩된 마을이므로 새말 또는 신촌(新村),신흥(新興)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매천(梅川)리, 봉촌(烽村), 상신(上新)리, 하신(下新)리, 대달(大達)리 일부를 병합하여 보령군 남포면에 편입하였다. 그 가운데 매내와 봉촌은 신흥1리에 속한다.

달산리의 큰댈월을 지나 수자골로 통하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들어가자 약 스무 집 정도가 모여 사는 매내 마을이 나왔다. 매내는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名堂)이 있다고 불려지게 된 이름이라 한다. 주민들이 모두 외출했는지 인적이 드물며 개 짖는 소리만 끊이지 않고 간혹 승용차나 트럭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마을 가운데로 지나가는 길은 포장되었으나 차선 없이 작은 차들이 서로 겨우 교차할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길이다.

이 매내에는 조선시대 지방사립교육기관인 서원이 서있던 터가 있다. 이 터를 신암서원지라고 부르는데 신암서원은 후진교육은 물론 선현(先賢)들의 제사를 지내는 기능을 했던 곳으로 조선 정조21년(1797)에 창건했다. 이곳이 무이산(武夷山),신안(新安) 등의 지명이 중국 주자(朱子)의 고향과 똑같은 점과 함께 우리나라 성리학의 도입자인 고려때의 주자학(朱子學)의 권위인 백이정(白이正)의 고향이 남포현(藍浦縣)(그의 묘와 신도비가 웅천면 성동리에 있으며 호는 이재요 자는 약헌이다)이라는 점을 들어 태학(太學)과 본현(本縣)의 유생들이 창건에 힘썼다고 전한다. 이 서원은 영조부터 정조에 이르기까지 붕당정치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서원남설(濫設)금지령으로 창건하던 해 이내 철폐되었으나 그 뒤 지방과 중앙의 유생들이 협력하여 순조 7년에(1864)에 복설(復設)하였다. 주자와 이재(彛齋) 백이정을 비롯하여, 우암 송시열, 익제 이제현, 수암 권상하, 남당 한원진을 매향했으며 노론기호학파의 학맥과 남포현 토착세력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 뒤 몇 차례 개수되며 이어오다가 고종 1년(1864)에 홍성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고 지금까지 몇 개의 초석과 터만 남아 ‘홍살문앞’등으로 이름만 전해져오고 있다.

봉촌 마을에 있는 노인회관

매내마을을 지나쳐 봉촌마을로 들어가니 역시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울 만큼 마을 분위기가 고즈넉했다. 아래뜸부터 위뜸과 건너뜸까지 봉촌엔 약 쉰 집에 백오십 명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다. 약간 언덕진 곳을 올라가니 백토개라는 곳으로 신흥1리의 노인회관 겸 마을회관이 나타났다. 백토개는 회관 남쪽에 지형이 소댕을 덮은 것 같다고 소당재라 부르는 곳부터 회관서쪽의 언덕아래 붕구데기까지 하얀 흙이 나온다고 붙여진 이름인데 고려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들이 있었다는 말도 있다.

마침 회관에 주민들이 모여서 있어서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불쑥 들어갔다. 안에서는 무슨 일이 있는지 ‘싱크대를 간다 대청소를 한다’하며 집기들을 이리저리 옮기느라고 분주하니 어수선했다.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려고 벽에 나란히 걸린 역대 노인회장들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종일 움직여야 할 일인 것 같았다.

“오서 오신 분이간디 뭐 때미 그런 걸 다 물으슈?”

별 일 안하고 서성이는 노인들에게 이것저것 묻자 대답은 별스럽지 않고 오히려 노인회장이 되물어왔다. 신문사에서 나왔노라고 대강 설명을 하고 몇 가지 더 물었지만 바쁜데 자꾸 묻는 것이 귀찮았던지 나오는 대답도 신통치 않았다. 더 물어보았자 나올 이야기도 없을 것 같고 바쁜 주민들에게 눈치만 먹을 것 같아 노인회관을 나오려고 할 때 한 노인이 잠깐 들려준 절터에 대한 이야기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동승의 혼령

약 칠백여년 전에 매내의 위쪽 매천소류지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절의 주지는 어느 여름에 시주를 얻기 위해 멀리까지 탁발을 나갔다가 잘생기고 총명한 어린사내아이를 보게 되었다. 볼수록 탐이 날 정도로 어여쁜 아이에게 반한 주지는 절에 돌아온 뒤에도 아이의 해맑은 얼굴이 눈에 밟혔다. 꼭 그렇게 예쁜 아이를 절에서 데리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아이를 절로 데려올 궁리를 하게 되었다. 주지는 아이를 보았던 집으로 찾아가 아이의 어머니를 만났다.

“지난번에 와서 보게 된 아이의 관상이 마음에 걸려서 다시 왔어요. 이 집은 이 아이 때문에 큰 재앙이 닥쳐올 것이고, 아이는 곧 죽게 될 관상이지요.”

주지의 말을 곧이들은 아이의 어머니는 크게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스님 내가 어떻게 해야 우리 아기를 살릴 수 있나요?”

고민하는 듯 한참 망설이던 주지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아이는 승려가 될 운명을 지녔으니 하루라도 빨리 절로 보내야 해요. 괜찮으시면 우리 절에 맡기세요.”

아이의 어머니는 주지의 말을 믿고 주지와 함께 남편을 설득하여 이제 겨우 젖을 떼고 말을 배워가는 생후 사십 개월 된 아이를 절로 보내기로 한다. 주지는 생으로 어머니와 떨어지는 아이에게 못할 짓인 줄 알면서도 몸부림치며 우는 아이를 업고 절로 내달렸다.

절에 온 아이는 어머니를 못 잊어 밤낮 울었고 주지는 처음이라 그러려니 했으나 날이 가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소용없고 맛있는 것을 주어도 먹지 않았고 달래다 혼내다 온갖 방법을 다 써 봐도 오로지 어머니만 찾으며 울었다. 바짝 마르도록 몇날 며칠을 먹지 않고 울기만 하는 아이가 딱해 당겨 앉혀보지만 아이는 오로지 무더운 날씨에 땀을 흘리면서도 ‘엄마에게 갈래요.’였다. 아이를 시원한 물에 씻기고 옷이라도 갈아입히자고 생각한 주지는 늘 목욕하고 빨래도 하는 폭포 아래로 데려갔다.

장마 때 비가 많이 온 까닭에 폭포아래는 소용돌이 칠만큼 꽤 깊고 많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주지는 씻는 것조차 응하지 않는 아이에게 씻고 좋은 옷을 입어야 어머니를 만나러 갈 거라고 거짓 약속을 했다. 아이는 어머니를 만나게 해준다는 주지의 말을 믿고 하자는 대로 순순히 응했다. 주지는 옷을 벗긴 아이를 안고 바위에 걸터앉아 씻어주었다. 오랜만에 씻는 아이도 이때만큼은 울지 않고 얌전히 몸을 맡기고 있었다.

정성껏 아이를 닦아주고 마지막으로 머리를 감기기 위해 안아들던 주지는 그만 물속으로 미끄러지며 아이를 놓치고 말았다. 깊고 빠른 물속에서 자신조차도 간신히 나온 주지는 아이를 건져낼 겨를이 없었다. 겨우 아래 개울에서 죽은 아이를 건졌고 그날부터 주지를 비롯한 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아이의 혼령에 시달려야 했다. 불당이건 해우소건 아무데서든 밤낮없이 혼자 있는 사람이면 불쑥 불쑥 나타나 하는 말이 ‘엄마 찾아 줘 엄마에게 갈래’였다. 정성을 다해 진혼제를 지내도 소용없고 아이의 어머니를 데려다가 위령제를 지내도 아이의 혼령은 끊임없이 나타났다고 한다.

결국 모두 절을 두고 떠나야 했고 아무도 그 절에 들어오는 승려가 없어 폐찰 되고 말았다고 전해온다. 주민들에게 절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터 주위에 시누대가 많고 땅에서 기와가 나오는 등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없어졌다고 한다. 그냥 돌아서 나오며 생각해보니 꿈속에서 본 것은 그 어린아이의 혼령이 아닌 그냥 하찮은 꿈이었을 뿐이었다. 절터의 사진을 단 한 장도 찍지 못해 아쉽게 되었다는 점이 바로 그랬다.

/프리랜서 안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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