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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면 화평리 화산내, 삿갓재 편
우리 마을이야기7)
2006년 10월 02일 (월) 00:00:00 보령신문 webmaster@charmnews.co.kr

주민들의 바램

화평2리인 화산내는 지난 호에 이야기 했던 동오리의 개울 건너편 마을이다. 뒷산에 꽃이 많이 핀다하여 보령댐 아래 매바위부터 그 산과 마을을 U자형으로 돌아 흐르는 내를 화산내로하고 마을이름도 아예 화산내로 부르고 있다. 다리를 건너 정판들을 지나 마을로 들어가자 마침 이장 김진옥 씨가 나와 있다. 전에는 100여 가호가 넘었던 마을인데 이젠 약 20개 가호에 30여 명만이 남아 주로 농사를 짓고 있지만 그나마 일손도 모자라고 대부분 주민이 60세가 넘어 쇠락한 노인들뿐이라 수입이 옛날 같지 않다고 한다. 농사 아닌 다른 수입원을 찾다보니 보령댐이 생기기 전엔 매바위 아래가 깊고 맑은 물로 여름이면 많은 피서객이 찾아오는 명소였다는 점이 가장 아쉬운 모양이다. 이장은 보령댐을 관리하는 수자원공사 측에서 출입을 통제하여 들어갈 수 없지만 그 아래로 쌍수문이 있고 사다리 바위가 있는 곳부터는 지금도 물이 좋고 경관이 아름다워 정리하면 다시 명소가 될만하다고 주장했다. 사실 동오리를 포함한 화평리 사람들은 집중호우 시에 댐 수문을 한꺼번에 열 경우 배수가 잘 이뤄지지 않아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며 잡목이 빼곡한 화산내를 시에서 조속히 정리하고 휴양유원지로 개발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괄(李适)네 묘와 이괄의 난

화산내 마을 뒤 우물산 새토백이에 인조 때 반란을 일으켰던 이괄네 묘가 있는데 그 묘에 얽힌 이야기를 물으니 이장은 우거진 풀숲을 헤치며 앞장서서 묘까지 안내해주었다. 이괄은 1623년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김자점(金自點) 등 서인과 함께 반정을 위해 사모군(私募軍)을 이끌고 홍제원(弘濟院)에 모였으나 총 지휘자로 추대되었던 김유(金裕)가 사전계획이 누설되었다는 이유로 소극적이자 이괄이 김유를 심히 비난했다. 그 일을 계기로 반정을 성공시킨 뒤에도 김유와의 관계가 불편했고 공서파들은 자기파 중심의 논공행상을 함에 따라 서인이 아니며 무관인 이괄을 정이품인 한성부판윤에 봉하는 데 그쳤다. 이때 금나라(後金)의 성장으로 인해 북방문제가 심각해졌고 이괄을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휘하의 평안북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에 임명하여 영변으로 출진시켰다. 그러고도 문회(文晦), 허통(許通), 이우(李佑)등은 이괄과 그의 아들 전을 포함한 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 기자헌(奇自獻), 현집(玄緝), 이시언(李時言) 등이 역모했다고 무고했다. 기자헌, 헌집 등을 문초했으나 단서를 잡지 못했음에도 공서파들은 이괄의 아들 전을 서울로 압송하여 문초하려고 군사를 보냈다. 위기를 느낀 이괄은 아들 전을 잡으러온 이들을 죽이고 잡혀가는 한명련까지 구해내며 임금 측의 악한 세력을 숙청한다는 명분으로 1624년 1월 22일(인조2년)에 난을 일으켜 12,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향했다. 이괄은 교묘하게 도원수군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경계가 심한 곳을 피해 샛길로 진격하다가 황주신교(黃州薪橋)에서 정충신과 남이홍이 이끄는 군대를 만나 대파했다. 이괄군이 개성을 장악하자 인조는 공주로 피했고 2월11일 이괄군은 서울에 입성해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을 왕으로 추대하고 관원과 행정체제를 새로 세웠다. 그러나 곧 도원수 장만의 군사와 각지에서 모인 관의 연합군에게 길마재에서 크게 패하고 야밤에 광주로 향하다가 관군의 추격에 완전히 흩어졌다. 이괄과 한명련은 2월15일 이천에서 부하장수 기익현과 이수백에게 죽음을 당했다.

왕봉산의 지세와 이괄네 묘

이괄네 묘에 석물(石物)이 여럿이 있었다는데 아직 벌초를 못해 풀이 무성해서인지 장군석 하나만 달랑 서있고 나머지는 모두 보이지 않는다. 이 석물가운데 장군석이 뉘어지면 화산내 남자들이 바람난다고 화산내 여자들이 세워놓고, 세워지면 동오리 선돌마을의 여인들이 바람난다고 선돌마을 남자들이 와서 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역모를 했던 집안의 묘라서 누군가 자꾸 석물들을 쓰러뜨리니까 자손들이 매번 손댈 수 없자 화산내 여인들에게 남정네가 바람난다고 소문을 내었을 것이고 또 그것을 쓰러뜨리는 자들이 선돌마을 쪽에 소문을 냈어 서로 세우고 뉘고 했을 것으로 추측 된다. 

이곳 우물산은 왕봉산 자락의 작은 능선이다. 왕봉산은 동서로는 급경사를 이루지만 남북으로는 완만하다. 이 산에 묘를 쓰면 왕이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있어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혈을 끊기 위해 산줄기 두 곳을 찾아 뜸을 뜬 뜸터가 있다고 지금까지 전해진다. 또 이괄의 난이 있은 뒤 나라에서 지관을 보내 지세를 살폈으나 왕봉산은 호랑이 혈인데 건너편 운봉산 밑 안터 마을이 호랑이에게 쫓기던 개가 반항하는 지형이라 호랑이 혈 구실을 못하며 화산 마을이 꺾어다 놓은 꽃의 지형이라 큰 인물이 나오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여 안심하고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또 호랑이 심장혈에 묘를 썼기 때문에 후손들이 찾아오면 죽는다 하여 자손들이 남쪽 월현 고개나 함정고개에서 망배(望拜)만 하고 돌아갔다는 전설도 있다.

화산내 정자나무 아래엔 마을 장사들이 힘자랑하느라고 들어 올려 정자나무를 한바퀴 돌아 내려놓고 그 위에 앉았다는 들메돌이 있는데 몇 년 전 마을 논을 경지정리 할 적에 땅에 묻힌 것을 찾아내어 놓았다고 한다.

큰삿갓재의 석상들

화평1리는 큰삿갓재와 작은삿갓재 둘로 나뉘며 약 45호 100여 명이 살고 있는데 옛날부터 이 지방의 가장 중요한 곡창지였던 약현들을 앞에 두고 있다. 큰삿갓재에선 약현들을 경지정리 하는데 힘썼다는 화평1리 전 이장이었던 이당우 씨를 만났다. 

큰삿갓재 입구에 해마다 단오 날이면 그네를 매고 놀았다는 수령이 수백 년 된 정자나무가 있고 그 아래로 난 길은 옛날부터 웅천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장꾼을 비롯한 나그네들이 많이 다니던 길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삿갓재의 팽나무 아래는 사람들이 늘 모이는 곳이었고 각처에서 온 장정들이 들메돌을 들어올리며 힘자랑을 하는 곳이었다. 화산리 정자나무 아래에 있는 들메돌과 같은 돌이 여기에 또 하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정자나무 바로 옆에도 수령이 수백 년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수리나무가 있고 그 아래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나 자그마한 두기의 석상이 서있고 두 석상 사이에 최근 세웠다는 아주 작은 아기석상 두기가 있다. 마을 주민들이 대보름날이면 이 석상들 앞에 온갖 보름음식을 차려놓고 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향토사학인들은 이 석상들을 화산내에 있는 이괄의 묘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하나 정확하지는 않은 것 같다. 아무튼 이 두기의 석상 가운데 아기석상이 한기가 있었는데 목이 부러지고 지금 있는 두기의 아기석상은 최근에 다시 세우게 되었다. 어쩌면 무속신앙을 가진 이가 아기석상을 모셔가려다 그랬거나 지나가던 취객의 소행으로 목이 부려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무튼 그 아기석상이 목이 부러지고부터 삿갓재에 사는 젊은이들이 죽어나기 시작하는 등 자꾸 흉흉한 일들이 일어나 어쩔 수 없이 두기의 아기석상을 새로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최근엔 사학연구하는 이들이 종종 다녀간다고 하는데 학계에선 이 석물이 조선시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큰삿갓재 고인돌 도툼바위

이 큰삿갓재 마을엔 고인돌이 있다. 마을 입구에 있던 도둠바위부터 마을 안쪽의 도툼바위가 고인돌이고 마을 남쪽에 토성이 있었기에 성도라와 성재란 지명이 있는데 이곳에 각각 한기씩 고인돌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가운데 마을 안쪽의 도툼바위는 곁에 도랑이 있었다. 요즘에 농촌지원사업의 하나로 농경지정리사업을 하느라고 도랑을 파내자 도툼바위가 한쪽으로 기울어졌고 똑바로 세우려고 하면 할수록 더 기울어졌다. 흙을 더 파고 다른 돌을 게고 별짓 다해도 바위는 점점 더 기울어갔다. 하는 수 없이 땅을 파고 바위를 땅속에 깊숙이 묻어버리고 말았다.

이 도툼바위를 묻은 일로 아기부처 때처럼 또 다시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매우 건장하던 한 젊은이가 갑자기 쓰러졌고 병원에서 암이란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는데 어느 날 탁발승 하나가 지나가다 젊은 이네 집에 들러 말을 했다.

“이 마을에 가장 오래된 무덤을 함부로 훼손하였구려. 그 무덤을 다시 돌려놓지 않으면 목숨을 건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많이 다칠 것 같소.”

“무덤이라뉴? 우린 절대 그런 적 웁는디유?”

“아주 오래된 무덤이라서 여니 바위로 알고 함부로 한적 없소?”

“바위유? 아! 있슈. 도툼바위! 그게 오래된 무덤였슈?”

환자를 통해 탁발승의 말을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은 약현들을 경지정리 할 때 장비를 이용해 묻었던 바위를 다시 발굴해 올리려 했으나 장비가 바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겨우 윗부분만 보이는 정도로 해놓고 말았다. 그 뒤 젊은이는 고인이 되었지만 더 이상 마을에 나쁜 일이 생기지 않았다.

이모저모 마을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당우 씨의 얼굴에 우수인 듯 저녁 그늘이 덮이고 있다.

/안학수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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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삿갓재의 석상들

큰삿갓재의 마을 전경

들메돌을 보여주는 김진옥씨와 들메돌의 모습

이괄네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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