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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면 동오리 오상·동막 편
우리 마을이야기 6
2006년 09월 18일 (월) 00:00:00 보령신문 webmaster@charmnews.co.kr

   
▲ 정좌정
동오리는 1리인 선돌마을부터 오상태와 곰골을 오상이라 하고 2리인 안골과 정주안을 동막이라 한다. 독수리바위부터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화산내를 따라 마을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보령댐을 지고 있어서 물이 더 풍족하지만 댐이 없었던 옛날에도 전혀 가뭄을 타지 않았을 만큼 물이 넉넉한 곳이다. 이에 마을의 전답들이 모두 옥토로서 부촌이 될 수있었다.

본래는 남포군 불은면(佛恩面)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보령군 주산면으로 바뀌면서 동막리(東幕里), 내동(內洞), 오상리(五常里)와 심전면(深田面)의 평장리(平章里) 일부를 병합해 동막과 오상의 이름을 따서 동오리라 부르게 된 곳이다.

보령댐을 내평리쪽으로 돌아 곰재를 넘으면 바로 동오리다. 곰이 자주 나타나 곰재라 부르던 고개는 아스팔트길이 나고 변했지만 옛날엔 오솔길이었다고 한다. 이 곰재엔 아주 깊은 사연을 담고 있는 소나무 한그루가 있다. 지금은 우거진 숲속에 서 있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옛날엔 소나무 옆으로 고개를 넘던 길이 있어서 오갈 때마다 보던 나무라고 한다.

곰재 아래는 곰골이다. 우선 곰골의 마을회관을 들렀다. 마을 주민들이 모여 마늘 까는 일을 하고 있다. 예전엔 이 마을 앞에 화산보가 있어서 이 일대의 중요한 곡창지대 역할을 했었고, 배를 대고 오석을 실어 날랐던 배청이 있어서 바다에서 직접 들여오는 해산물도 풍부했던 곳이라고 한다. 이에 모든 주민이 잘 사는 마을이고 등짐장수, 옹기장수, 유기장수, 소금장수 많은 장사꾼들이 자주 찾아오는 곳이었고, 깊은 내륙지방 사람들이 곰재를 넘어 소금이나 젓갈, 생선 등을 사러 오던 곳이다.

미산면의 어느 깊은 산골에 살던 한 젊은 사내도 소금을 사러왔다. 사내는 유부남이었지만 이곳의 한 처자에게 반해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여인의 미모가 산골무지렁이인 자기 아내와는 비교도 못할 만큼 아름다웠다. 사내는 자기의 일을 까맣게 잊고 노자까지 떨어지도록 오래 머물렀다. 오로지 사내의 마음엔 그 처자 밖에 없었다.

집에서 사내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그의 아내는 석 달 열흘이 지나도록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직접남편을 찾아 나섰다. 부인은 평나리까지 와서 남편을 기다렸으나 남편은 소식조차 없었다. 다시 남편이 간 곰골로 찾아 나서게 되었고 곰재까지 온 아내는 남편의 소식을 듣고 차마 마을로 내려가지 못했다. 남편에게 곰재에서 기다리겠노라고 인편에 전했으나 남편은 오지 않았다. 혼자 곰재에서 머물며 이틀을 기다리던 아내는 여자 혼자 있는 것을 노린 치한에게 겁탈을 당하고 말았다. 정조를 잃은 몸으로 남편을 만날 수 없게 되자 아내는 이 소나무에 목을 매었다. 그러고도 몇 달 뒤 기다리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린 사내는 자신 때문에 죄 없는 아내가 죽었다고 자책하며 또 이 소나무에 목을 매었다고 한다. 그 뒤로 이 소나무는 저주를 받았는지 줄기가 뒤틀려 올라가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한다.

   
▲ 곰재 소나무
들리는 말에 의하면 전봉준이 이끌었던 동학난리 때 가담했던 인근 주민을 매달아 죽였다고도 하고, 일제 땐 삼일절 만세운동에 가담한 양민을 매달아놓고 학살하였다고도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니 확실하지 않지만 소나무는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부패한 권력이 어떻게 양민을 괴롭혔는지, 일본제국주의의 무력 앞에 끌려와 잔혹한 고통속에 죽어간 조선사람이 얼마인지 다 알 것이다. 그 맺힌 한이 얼마나 원통하기에 온 줄기가 기이하게 틀어져 올라가고 가지도 미친 듯이 얼크러진 것일까? 한 때 소나무를 건들기만 하면 피눈물을 흘렸다는 말이 전해질 만큼 그 모습과 기운이 흉흉하기 그지없다. 그러저러한 이야기 때문인지 어느 날인가부터 곰재로 넘나들던 사람들은 독수리바위 앞으로 돌아 다녔고 차 다니는 길이 나기 전엔 아무도 곰재의 길을 넘나들지 않았다고 한다.

독수리바위 앞의 계곡은 매년 여름 피서객들이 찾아오던 유원지였다. 그곳에 장수가 말을 타고 지나가다 굴러 떨어졌다는 전설이 있고 그 말의 무릎자국과 발굽자국이 찍혔다는 바위가 남아있었다. 보령댐을 건설할 당시 마을주민들이 보존을 간곡히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훼손되어 지금은 없어졌다. 독수리바위에서 화산내를 따라 내려와 정판보를 지나면 정주안이 나온다. 정주안은 서북쪽 동막이며 입구에 두 그루의 큰 정자나무가 있고 정주안 주민들이 모여 휴식하는 정좌정(正坐亭)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약 700년 전인 고려 말 때 지나가던 한 장수가 산수(山水)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쉬다가가 그냥 떠나기가 아쉬워 정자나무 한그루를 심어놓고 갔던 곳이다. 그 정자나무는 약 삼십 여 년 전에 완전히 고사(枯死)하고 지금은 그 나무를 대신하여 정좌정 곁에 이식한 두 그루의 큰 정자나무가 있다.

정주안에서 남쪽으로 돌아가면 안골이다. 안골에는 범바위가 있는데 부여 홍산 사람이 바위아래에 조상 묘를 써 놓았는데 그 후손이 참배하러 왔다가 범이 앉은 줄 알고 무서워서 망배만하고 돌아간 일이 있다고 한다. 안골 뒷산에는 평나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고 훗날 댐이 생길 것이라 하여 그 고개를 수문재라 불렀다는데 보령댐이 생길 줄 예언했던 것 같다.

동오리에서 가장 유래 깊은 마을이 오상태(五相台)다. 고려 공양왕 때 다섯명의 재상(宰相)이 고려가 멸망하자 조선조가 싫다고 이곳에 은거했다 하여 오상태(五相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오상태는 보령오열사(保寧五烈士) 가운데 한명인 추강(秋江) 백낙관 선생이 출생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남쪽 오상을 선돌마을이라 한다. 마을 한가운데에 선돌이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선돌은 지금도 밭 한가운데 우뚝 서있는 바위로서 높이가 2m가량 된다. 예전엔 배나 더 높게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이 선돌이 누우면 개울 건너 화산마을이 잘된다고 화산 사람들이 이 선돌을 눕혀놓았던 일이 있었다. 그 때부터 이곳 선돌을 비롯한 곰골과 오상태 마을에 흉흉한 일이 생기기 시작하여 다시 선돌을 세웠다. 세울 때 화산마을 사람들이 또 눕히지 못하도록 절반이나 땅속 깊이 묻어서 세워서 낮아졌다고 한다. 

이 마을엔 선돌뿐만 아니라 마당바위, 고깔바위, 방귀바위 등 신비스럽게 보이는 바위가 여럿 있다. 선돌마을에서 만난 한 노인은 이 바위들에 얽힌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 선돌
성주의 어느 마을에 아주 힘센 장사가 살았다. 이 장사는 어느 날 역모에 가담했다는 모함으로 잡혀 갔다. 장사의 부인은 남편이 죄 없으니 곧 풀려날 것이라고 별 걱정 없이 기다렸지만 다음날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슬퍼할 사이도 없이 부인은 가족도 잡으러 오고 있다는 소리에 황급히 도망쳐야 했다. 부인은 어린 남매를 안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에서 산으로만 달아나 겨우 살아났다. 급히 도망치느라고 아무 것도 가지고 나오지 못한 부인은 아이들과 함께 깊은 산중에서 갈근(葛根)만으로 연명했다. 한 일년을 갈근으로만 살면서 산비탈을 개간했다. 일년 동안 아이들은 몰라보게 자라고 힘도 무척 세져 부인을 도울 정도였다. 부인은 일년 뒤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지은 농사로 아이들에게 갈근을 먹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한해를 갈근을 먹이지 않자 아이들의 힘이 떨어지고 성장도 더딘 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부인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한다며 아이들에게 다시 갈근을 먹였다. 아이들은 점점 크고 세게 자라 어마어마한 장사가 되어갔고, 날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위해 힘을 기르고 무예를 익혔다. 장사였던 아버지의 피를 받아 두 아이 모두 힘이 넘쳤다. 어느 날 누이동생이 깊은 산중에서 혼자 무예연습하다 호랑이를 만났다. 무예솜씨를 실험해보고자 호랑이를 몹시 때려주고 쫓아버렸다. 그 날 산신령이 격노하여 나타났다.

“누가 감히 산신의 호랑이를 괴롭혔느냐! 내 너희 남매를 엄히 벌하겠노라!”

“애덜이 철이 웁써서 큰 죄를 졌나이다. 자식을 제대루 가르치지 뭇헌 지 잘못이니 벌은 지게 주시구 애덜은 용서해주소서.”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부인의 간곡한 태도에 산신령의 노여움이 누그러졌다.

“내 너의 남매를 용서하마. 대신 화를 부르는 복수심을 버려라. 장차 황해로 오랑캐가 쳐들어올 것이니 그곳으로 가서 오랑캐를 막는데 그 힘을 쓰도록 해라.”

   
▲ 고깔바위
 부인은 산신령의 뜻에 따라 아이들을 주렴산으로 보냈다. 남매는 오랑캐가 쳐들어올 것을 대비하여 주렴산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크고 튼튼한 성을 쌓기 위해 오라비는 쌓고 옥녀각시는 인근의 산에서 큰 바위를 주워 날랐다. 그날도 옥녀각시가 아미산에서 마당바위를 치마폭에 담아오는데 오랑캐가 쳐들어왔다고 오라비가 급한 목소리로 불렀다. 이미 오랑캐와 싸움이 붙어 긴급한 상황임을 안 옥녀각시는 황급히 선돌마을 뒷산 멍덕봉에서 건너편의 운봉산까지 건너뛰었다. 그때 치마폭이 찢어지며 마당바위가 떨어졌고 지팡이가 꽂혀 선돌바위가 되었다. 벗어던진 모자는 고깔바위가 되었으며 벗겨진 신발바위도 있었다고 한다. 죽이고 죽여도 몰려오는 수많은 오랑캐와 삼박사일을 쉬지 않고 싸우던 남매는 죽었으나 오랑캐도 너무 많은 희생으로 물러가게 되었다.

마을 남쪽 끝에는 옥녀각시가 오라비와 장난하다 뀐 방귀 바람에 맞아 반쪽 갈라졌다는 방귀바위도 있다. 이 이야기는 아비가 억울하게 죽었으나 남매가 엄청난 힘을 지니고도 억울하게 죽은 아비의 복수를 생각하지 않고 나라를 구하는 일에 목숨을 바쳤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야기를 들려준 노인은 마른 고춧대에 희아리가 주렁주렁 달린 고추밭 길을 힘없이 걸어가고 있다.
   
▲ 마당바위

/안학수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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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귀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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