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컥하는 마음에 오랜 시간동안 정들었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그만두었다.

아이들 어릴 때부터 직장을 다닌 관계로 모처럼의 휴식은 내게 황홀한 여유를 가져다주었고 아침이면 아무도 없는 집에서 누구하나 말 붙여주는 이 없어도 하루가 너무 짧고 즐거웠다.

남편과 아이들의 호들갑스런 감동을 상상하며 오후가 되면 갓 시집온 새색시 되어 찬거리를 준비하고 집안청소와 아이들 옷장정리도 말끔하게 했다. 그러나 변덕이 심한 탓일까? 얼마가 지나지 않아 그런 혼자만의 생활이 무료했고 삶이 너무 고즈넉하고 스릴도 없고 성취감도 없고 정보에도 어두워지는 것 같고 할일도 너무 없는 것 같고 (사실 집안일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인데 안하면서...) 나만 뒤쳐지는 것도 같고......

난 다시 직장을 구하기 위해 노동부에 이력 올려놓고 여기저기 직장을 알아보았다 그러던 중 시부모님과 동행해서 서울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 시부모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연동하우스에서 방울토마토를 하셨는데 이젠 나이 들고 힘들어 연동하우스를 그만 둘까 하신다고 하셨다.

난 평소에 그런 말씀 하시면 제발 일 좀 그만하시고 소일거리나 하시며 여생을 편히 사시라고 권했었는데 그날은 귀가 번쩍 열렸다. 그래 이거다! 이제부터 내가 그 일을 해봐야 겠구나 하는 생각에 얼른 “아버님 그거 그냥 하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올해는 아버님이랑 함께 하면서 기술을 전수받고 내년부터는 제가 맡아서 할 테니 그냥 저랑 함께하세요”했다. 시부모님은 이게 웬 반가운 말이더냐 하시는 맘으로 “니가 그런다면 나야 좋지 너 직장 다니는 것보다는 돈벌이도 훨씬 나을게야” 하시며 한술 더 뜨셨다. 남편은 노동은 아무나 하는 줄 아느냐며 내가 한다면 부모님이야 좋으시겠지만 분명 하다가 포기할거고 그때가면 부모님은 더 힘들어하실 테니 아예 시작도 하지 말라고 극구 말렸지만 난 열심히 하우스를 오갔다.

12월쯤 모종을 해서 5월쯤이면 끝나는 방울토마토는 그 수입이 압권이다. 5~6개월이면 내 직장생활 1~2년 연봉은 족히 넘기도 하려니와 노후준비로도 딱~인 것이다.

처음 어린 모종일 때는 그저 드라이브 하는 기분으로 FM 볼륨 높여가며 한가하게 놀러다니 듯 일주일에 한두 번 하우스를 다녔다. 어느새 두 세 달이 지나 탐스런 방울토마토가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했고 그런 방울토마토를 수확하는 일을 너무도 재밋고 즐거웠다.

처음엔 5키로 방울토마토를 삼일에 한번 10박스쯤 따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20,30,40,50, 60,70박스....처음에는 정말 아무문제 없었다. 아~그런데 아니었다. 토마토 수확량이 늘어나면서 나의 몸은 견딜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 들어갔다. 밤이면 밤마다 삭신이 쑤시고 입술이 부르트고 급기야는 몸살에 대상포진까지 걸렸다. 나중엔 시도 때도 없이 아팠다.

밤이 되면 더욱더 증세가 심해졌고 내 몸은 더욱 만신창이가 되어가지는 기분이 들었다.

후회가 절절했지만 말 한마디 못했는데 어느 날 시어머니께서 “에미야 많이 힘들지? 입술이 다 부르텃구나 아무래도 안 되겠다 우덜은 평생 해 온 일이라 괜찮은디 안 해본 너는 어렬겨 너 혹시 직장 다니고 싶으면 다녀라 여기는 일꾼 으더서 어떻게 해볼테니... 이러다 하나뿐인 메느리 잡겠다.” 하셨다. 나는 “죄송해요 어머니 내년부터는 하우스 세놓는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 아무래도 저는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하고 솔직히 말씀드렸다.

우연이었는지 그 다음날 잘 아시는 분한테서 전화가 왔다. 지금 근무하는 이 사무실에서 긴 시간은 아니지만 함께 일해보자고......난 생각할 틈도 없이 얼른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유일한 탈출구였기 때문이다. 한순간 너무 경솔한 결정을 했던 내게 질책을 가하면서 시부모님께는 너무 죄송했지만 어쩌면 나보다는 노련한 일꾼이 더 도움 되실 거란 맘으로 위안을 삼는다. 두 분의 주름진 모습을 생각하니 너무 죄송스럽다.

<보령도서관주부문학회보령예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