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낭송을 하고자 지하철 상암경기장 역에서 내렸다.

지하철역 구내를 빠져나와 거리에 나서니 찬바람이 살갗에 차갑게 스며든다. 소한(小寒)이라, 절기(節氣)가 몰고오는 한파(寒波)인 것 같다.

우연히도 갑신년엔 시낭송을 해달라는 청탁(請託)이 많았다.

그 날은 그 해 청탁의 마지막 행사이지만, 나는 감기기운이 있어 조금 망설였다. 그러나, 총무님이 “나오지 않으면 안 돼요. 꼭 나오세요.”하는 부탁을 한다. 그 것도 세 번씩이나 간곡한 부탁을 하는 바람에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교성이 좋은 맹 총무님의 서글서글한 눈망울에 사로잡힌 것일까. 행사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화장실에 들렀다. 화장실에 들어서니 육십대쯤 되어 보이는 어느 아주머니께서 나에게 “오디서 왔슈?”라고 묻었다. 나는 그날 저녁 청소면 시낭송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왔노라고 했다. 그 아주머니는 맹 총무가 “누님, 누님 하고 어찌나 조르던지 세 번이나 전화를 했슈”라며 그녀도 총무님의 간곡한 부탁에 나왔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모임에 안 가고 그녀는 고향 향우회로 발걸음 했다며, 거울 속에 빛바랜 자신의 얼굴을 매만진다. 혹시 고향의 첫사랑 오빠라도 만나려는 것일까? 칼바람을 가르며 거기까지 온 것은 고향이 그립고, 총무님의 친절함에 그녀도 발걸음 했으리라.

핸섬한 얼굴에 영국신사 같은 남자, 지붕 위엔 희끗희끗한 빈발이 잘 어울리는 남자, 환한 얼굴로 웃으며 다가오는 총무님이다. 대중과도 잘 어울리는 소탈한 성격이라서 그토록 회원들을 많이 모이게 했을까? 행사장 안에는 150여명의 청소면 향우회원들이 홀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디서나 고향사람들은 얼굴만 보아도 조금 넉넉해 보여 친근감이 간다. 나는 훈훈한 고향향기를 맡으며 내빈석으로 안내 받았다.

잠시 후 사회자는 청소면에서 방금 올라오신 회원들을 앞으로 나오란다. 사회자의 말에 한 스무 명 정도가 나와서 한 줄로 늘어섰다. 그 분들은 각자 인사말을 하고자 전부터 준비를 한 모양이다. 고향을 지킨 사람이야말로 나는 고마운 분이란 생각이 든다. 고향 떠날 때 잘 살라고 손 흔들어 주시던 고향 분들이 아니던가. 이제 고향에 내려가도 겸손한 마음으로 어른들을 찾아 봬야 할 성 싶다.

한 분은 자기소개를 장황하게도 한다. 농산물을 제값 받기 위해선 선전을 잘 해야 효과가 있을 것이다. 바다 건너로 수출해서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글로벌 시대가 아닌가. 그는 복분자 열매를 따기 시작했다며 머지않아 술도 나올 거란다. 그 분께서 양돈을 해서 돼지고기를 팔아야 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또 가을엔 ‘오서산’ 갈대축제에 오란다. 오서산에 오르면 넓은 서해 바다가 한 눈에 펼쳐진다고. 하기야 그 산봉우리엔 해마다 은빛 갈대꽃이 피어서 장관을 이루는 보령의 ‘명소’이다. 연인과 함께라면 서풍에 휘날리는 갈대꽃 속에 푹 안겨도 좋으리라. 그 모습 카메라에 찰칵 담으면 가을 풍경으론 좋은 추억을 간직할 것이다. 그 이장님은 고향 방문을 많이 해달라는 간절한 부탁이다.

인사말이 조금 길어지자 사회자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며 두어 분의 인사말로 줄인다. 나머지 분들은 조금 아쉬운 듯 고개 인사로 대신한다. 서울 온다고 아침부터 그 얼마나 서둘렀을까. 다른 분들의 얼굴엔 섭섭함이 엿보인다.

많이 모인 회원을 두고 ‘총무가 회원 수를 늘렸다’는 이야기가 들릴 때, 높은 분께서 단상으로 올라서신다. 참으로 훤칠한 인물이다. 그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고향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인사를 정성 것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탯줄을 묻은 고향분들이 아니던가. 그 분들이 그리 많이 오셨으니 그 얼마나 흐뭇하랴. 소박한 마음으로 훈훈한 마음으로 그 마음 변치 않으셨으면 한다. 저 시골구석 외로운 노인들 마음도 헤아리면서 나랏일을 하신다면 뉜들 싫어하리요. 그 자리는 올라가기만 하면 고개가 뻣뻣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고들 한다. 항상 초심의 마음을 잃지 않는 신뢰할 수 있는 그런 품격있는 분을 우리는 원한다.

낭송을 하기에 앞서 나는 고향을 버린 것이 아니라 서러운 가난 때문에 고향은 잠시 게 두고 왔노라고 했다. 그리고 망년회란 그 해에 괴로웠던 일들을 잊으라는 뜻으로 알고 있지만, 저는 그해(年)에 잘못 된 일들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반성하는 날을 갖는다고도 했다. 날마다 마음 닦고 날마다 반성해야 하는 문인의 한 사람으로써 오늘의 인심에 대해 약간의 풍자(諷刺)섞인 말을 했다.

 <향수>란 김광균 시를 낭송하고 단상을 내려오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된 모양이다. 회원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줄 서기 시작한다. 나도 뷔페 접시를 하나 들었다. 그들의 줄 속에 끼어 서자니 여성회원들이 많이 보인다. 다른 면 회원에 비해서 유독 젊은 여성들이 눈에 뜨인다. 이제 사회는 유능한 여성을 원하는 시대가 왔다. 고향 여성들의 사회 참여도가 높아졌으면 좋겠다. 결코 맹하지 않은 맹두형 총무님의 능력이 놀랍다. 총무님의 원만한 대인관계가 이토록 많은 회원들을 모이게 하지 않았나 싶다.     

“누님, 누님, 꼭 나오슈?”하고 친절하게 다가오면 누구라도 그 사교적 기술에 아니 나올 수 없으리라. 대인관계가 미숙하면 무슨 일이든 해 나가기 어려운 시대라서 말이다.

이제 21세기를 살아가려면 뒷방에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사회성을 배워서 경제시대를 잘 견뎌 내는 보령향우회원들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