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새해의 첫날은 찬란히 떠오르는 태양의 사진이 1면을 장식한 두툼한 신문을 펴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올해도 예외없이 ‘비밀의 정원’의 문을 여는 소녀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리하였으니 그건 후각을 자극하는 알싸한 잉크냄새에 묻혀 ‘신춘문예’당선작들을 읽으며 휴일을 보내는것이 이맘때의 나만의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활자화된 검증받은 작품을 읽는 즐거움과 더불어 바로 옆지면의 심사평과 당선자의 약력, 당선소감을 읽어보며 신춘(新春)이라는 말에 걸 맞는 그들의 젊음과 신선함에 나 또한 흠뻑 도취되어 보는 즐거움 또한 만만치 않기에 그러하리라 생각해본다.

그런데 올해는 놀랍게도 예순의 아주머니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에 작품을 읽는 건 뒤로하고 그 당선자의 이력과 시진을 한참이나 들여다 볼 수 밖에 없었다.

영문과를 나와 번역일을 하는 등 오랜 세월 글 쓰는 일과 멀어져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하더라도 그 나이에 신춘문예라니 그 용기와 도전정신에 재삼재사 놀라며 많은 생각을 해 본 새해 첫 날이었다.

한국 사회의 새로운 소외계층인 조선족 문제를 다룬 ‘ 가리봉 양꼬치’로 5수끝에 등단한 박찬순씨의 ‘나이든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을 쓰겠다’는 당선소감을 읽으며 내 머릿속엔 소중한 추억하나가 한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졌다.

여고 2학년때 동생과 둘이서 찾은 외갓집의 어느 여름날 오후….

안채 마루끝에 서면 멀리 내다보이던 들판 끝 강물은 은빛비늘을 가진 한마리의 아름다운 물고기처럼 몸을 뒤척이며 유유히 흐르고 있었고, 그리도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마저 오수에 빠진듯 고요한 정적속 햇살만이 무수한 금빛화살이 되어 앞마당의 수국꽃 잎파리 위에 내려 꽃히고 있었다.

평소 우리들의 말벗이 되어주던 이모는 일직이라 학교에 가셔서 안계셨고 심심풀이용 읽을거리를 찾느라 이모방을 뒤적이다 만나게 된것이 당시’여성동아’라는 잡지에서 공모한 문학상의 당선작인 박완서씨의 ‘나목’이라는 작품이었다.

6.25 전쟁을 배경으로 정신적, 물질적으로 황폐해진 삶 속에서 고독한 청춘과 진정한 예술가의 성숙과정을 대비시킨 그 작품이 사춘기 소녀의 감성에 부합되었었는지 아직도 그 줄거리가 대략 기억이 난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전업주부로 마흔이 넘어서야 등단한 박완서씨가 늦깍이 작가의 표본으로 자주 거론되는것을 매체에서 접할때마다 엎드려 책 읽느라 어둠이 먹물스미듯 사위를 에워 쌀때까지도 몰랐었던 외갓집 사랑채 만야당(晩冶堂)의 그 여름날 인상이 선명히 떠오르곤 한다.

일찍 돌아가신 형님을 대신하여 천석군 살림을 맡아 하시다가 장손이 서울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오자 모든걸 맡기고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셔서 마흔이 넘어 기어이 법관의 뜻을 이루셨던 외할아버님.

늦을 만(晩)자, 대장간 야(冶)자, 두 글자를 선택하여 호를 지으시고 현판을 직접 쓰셨던 건, 비록 늦었지만 자신을 도야하는데 더욱 정진해야 한다는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 크셨기에 그리 하셨을꺼라고 짐작해본다.

오늘 새삼 만야당 옆 모퉁이 돌아서면 불던 대숲의 바람과 사랑채 뜰의 붓꽃 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듯 하다.

새 봄, 늦었기에 더욱 아름다운 새출발을 준비하고 계신 분들의 앞날에 그분들의 연륜과 지혜가 보석처럼 빛을 발하길 기원해본다.

도전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해야 할 일임을 다시 한 번 깨달은 것만으로도 행복함이 샘물처럼 가득 차오른다.

<보령도서관 주부문학회 보령예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