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윌리엄 예이츠.

1892년에 발표된 「이니스프리의 호도」(The Lake Isle of innisfree)는 그가 20대 무렵, 아일랜드를 떠나 런던에서 생활하면서 어린시절의 추억을 그리며 평화스러운 전원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노래한 서정시이다. 시 속의 이니스프리는 고향인 슬라이고 지방에 있는 호수속의 작은 섬이다.

번잡한 이국에서의 생활 속에서 이니스프리는 그에게 벌들이 윙윙거리고, 숲 속에서 귀뚜라미 울음소리와 호숫가에 출렁이는 물결소리가 들려오는 아름다운 이상향의 세계로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 이 시를 읽다보면 예이츠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그 곳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느끼게 된다. 마치 우리 동양의 선비들이 관직에서 물러날 때면 읊곤 했던 도연명의 「귀거래사」처럼 이 시는 서양인들이 꿈꾸는 유유자적한 전원생활의 이상향으로 널리 애송되고 있다. 현실의 삶이 고단 할수록 이상향을 그리는 마음 또한 커져가게 될 것인데, 근래의 화제작인「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도 그런 인간유형을 만나게 된다.

어느 동네의 허름한 권투 연습장을 운영하고 있는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권투라는 거친 이미지와는 달리 틈만 나면 게일어(아일랜드 켈트족 언어)로 쓰인 예이츠의 시를 읽곤 하는 섬세한 지적 감성의 소유자이다.

유능한 상처 전문가이기도 한 그이지만 정작 자신의 상처는 스스로 치유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매번 수신자 거부로 되돌아오곤 하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 이미 박스 하나 가득히 모아둔 그 편지들은 유일한 혈육에게서도 이해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쓸쓸한 그의 노년의 상징이다. 전직 권투선수였던 스크랩(모건 프리먼)에 대한 오랜 죄책감 또한 그에게는 평생의 짐이다.

기후유증으로 한쪽 눈을 실명한 그에 대해 코치로써 시합을 중지시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느끼게 되어 자기 곁에 두고 그 뒤를 수 십 년 째 보살펴 주고 있다. 또, 최근 수년간 정성을 다해 챔피언 급으로 키워놓은 선수는 어느 날 그를 배신하고 다른 팀으로 가버려 그에게 큰 좌절과 허탈감을 안겨준다. 이렇게 상처투성이의 그에게 어느 날 불쑥 나타난 메기(힐러리 스웽커)는 마지막 치명타를 입힌다.

열세 살 때부터 집을 떠나 가족을 부양하느라 서른한 살이 된 지금도 하급 웨이츄레스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그녀는 오직 권투만이 남은 희망이라고 그에게 매달린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그였지만 그녀의 열정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받아들이고 챔피언을 위한 훈련을 쌓아 나간다. 그리고 점차 서로는 혈육보다 더 진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프랭키는 그녀에게 게일어로 ‘모쿠슈라’(나의 소중한, 나의 혈육이라는 뜻)라는 애칭까지 지어준다. 그러나 꿈꾸었던 영광의 순간이 바로 눈앞에 있을 때 상대편의 반칙으로 그녀는 목뼈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전신마비가 되고 만다.

그 뒤 “그 동안 충분히 행복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간절한 소망대로 그는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안락사 시키고 만다. 그 날 이후로 자취를 감춘 그가 여생을 보내고 있는 곳,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레몬파이를 파는 곳’ 이라고 그녀가 알려준 IRA Walkside식당, 언젠가 그녀의 고향집에 함께 갔다 가족들에게 상처만 입고 돌아오는 길에 들렀던, 한적한 시골도로변에 위치한 식당이다. 그 때 그는 그곳이 마음에 들어 이런 식당은 얼마나 할까. 내가 모은 돈이 좀 있는데 나중에 이런 식당이나 하며 살까? 하는 말을 무심결에 그녀에게 했었다. 결국, 회한으로 가득 찬 인생을 이끌고 숨어든 그 식당이 바로 마지막 안식처인 그의 이니스프리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곳에서도 ‘살인’이라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죄책감 속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될 것 같다.

보는 이 에 따라 다양한 주제가 떠오르겠지만, 나의 뇌리에는 삶의 연륜과 깊이가 가득한 주름살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예이츠의 시를 읊던 그 모습이 오래도록 남아 있다.

그래서 그 옛날 영문학도 시절 나를 매혹 시켰던 그 찬란한 이름들-예이츠를 비롯해 버나드 쇼, 사무엘 베케트, 조나단 스위프트, 오스카 와일드, 제임스 조이스… 의 나라인 아일랜드에 언젠가 가게 되면 이니스프리의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저녁 홍방울새의 날개 소리와 찰랑이는 물결 소리를 내 귀로도 들어 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한다.

한명의 작가가 혹은 한편의 시가 탄생한 곳이 전 세계인의 마음의 고향이 될 수도 있다는. 그 위대한 문학의 힘을 이 한편의 영화에서도 나는 다시금 확인 할 수 있었다.

<보령도서관주부문학회보령예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