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풀대는 달력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남은 한 장에 대한 아쉬움보다 넘겨진 열장에 대한 미련이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늦가을에 접어들면 장마철에 곰팡이 피듯, 허탈감이 온 마음에 번진다. 이러한 때에 여러 회원의 글을 모아 책을 내게 되었으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가을걷이 한창일 때 나 또한 문집 발간 준비로 하는 일 없이 분주 했다. 매사에 꼼꼼하고 일 욕심 많은 회장님, 되도록이면 우리 회원들에게 부담주지 않으시려는 도서관장님의 깊으신 배려로 비교적 한가한 총무였다. 편집후기를 이메일로 전송하고는 나이답지 않게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이 이런 걸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다. 원고모집이며, 행사준비, 그리고 회원들의 일치된 마음, 대체로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전에는 행사준비와 사회 보는 일이 주된 관심사였다면, 이번에는 한여울 6집에 실린 시에 온 마음이 쏠려 있었다. 편집후기에도 썼듯이 ‘시’와 연애를 하며 살고 있는 듯 시에 빠져있었다. 그래서인지 사회를 잘 봐야겠다는 의지도, 실수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없었다. 거기에는 어느 시인의 말씀이 주효했다. “글쟁이는 글만 잘 쓰면 되는 겨. 그 외 것들은 허접 쓰레기여”라는 말씀을 듣고도 아직은 허접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일에 연연해하며 혈기부리고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진정한 글쟁이의 길이 아직 내게서 멀다.

원근 각처에서 많은 문인들과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행사는 진행 되었다. 그 중 오랜만에 뵙는 참 반가운 분이 있었으니, 바로 이 교수님이시다. 서안시문학회원으로 활동하고 계시며 문학보다 서예로 더 유명하신 이 교수님은 대학 때 우리 과의 학과장이셨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교수님은 중요한 약속도 물리치시고 우리 행사에 오셨다고 한다. 그것이 도서관장님 때문이든 나 때문이든 개의치 않는다. 만나 뵙게 되니 더없이 반가울 뿐이다. 사제지간이 문학의 선후배로 다시 만나니 기쁨은 배가 되었다.

초반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 것은 도서관장님의 파격적인 인사말씀 이었다. 바이올린으로 두곡을 연주해주시고 내빈들의 앵콜에 화답하신 연주곡 ‘여수’를 듣고 있자니 가을이라는 거대한 애드벌룬 위에 눈감고 있는 듯 환상적이었다.

회원들의 작품 낭송과 평생학습교실 동아리들의 다양한 발표순서를 마친 후 무척 기대했던 성기조 박사님의 문학 강연이 있었다. 얼마나 도취되었는지 강연이 마무리되는 줄도 모르고 넋 놓고 듣고 있었다. 40분이 후딱 지나간 것이다. ‘행복을 전제로 고통을 이겨내는 훈련을 시키는 것’이 문학이라고 하신 말씀은 내게 깊숙이 각인되었다. 정녕 나의 경우가 그러했다.

비록 나만이 유일한 독자였던 일기장이었지만 그곳에는 힘겨웠던 삶의 고통이 뿌려져 있었고, 때론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쳤던 흔적들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친밀한 벗이자, 훌륭한 상담자였던 일기장이 좀 더 넓은 지면으로 옮겨지기까지 알게 모르게 도와주신 분이 있다. 보령예지회를 소개해주시고 변함없이 격려해주신 그분이 아니었다면 지금 느끼고 있는 이 행복감은 영영 맛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의도적으로 행복하고자 문학을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문학을 통해 느끼는 나만의 행복이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문학이 있기에 허허로운 빈 들녘 앞에 홀로 서 있어도 가슴 가득 차오르는 넉넉함이 있는 거라고 나는 믿는다.

‘늘 똑같은 일상을 되풀이하는 인간의 맹목적 습성을 공격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던 살바도르 달리의 말을 인용하여 나는 “늘 똑같은 일상을 되풀이하는 인간의 맹목적 습성을 공격하기 위해 문학을 한다”고 말하고 싶다. 성 박사님의 강연처럼 문학은 일상의 삶에서 빚어지는 빈번한 갈등과 고통을 분명 행복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나의 믿음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밝힌다.

가을 햇살이 따사롭다. 피부로 느껴지는 쌀쌀함이 더욱 햇살의 고마움을 느끼게 해준다. 한해의 마지막 계절이 눈앞에 다가옴으로 허탈감에 빠지기 쉬운 11월, 나와 예지회원을 비롯한 모든 문학인들은 나락 한 알 없는 텅 빈 들녘에서 무수한 알곡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보령도서관주부문학모임예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