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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김삼웅 지음『이회영 평전』
책익는 마을 원진호
2021년 03월 09일 (화) 11:32:17 보령신문 webmaster@charmnews.co.kr
   

■ 삼한갑족
 이회영선생은 1867년 태어나 일찍이 양명학을 공부했고, 남들이 벼슬로 나아갈 때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이조판서인 아버지가 1907년 돌아가시자 노비들을 해방시켰다. 상동교회 부설 상동청년학원 학감으로 재직했고 헤이그밀사 파견을 기획하기도 했다. 독립운동 비밀결사체인 신민회 조직에 참여했고 1908년 21년 나이차가 있는 이은숙과 한국 최초 신식결혼식을 올렸다. 1910년 국치를 당하고 60여 명의 육형제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을 하였다. 그는 ‘명문호족으로서 왜적의 노예가 될 수 없고 왜적과 혈투하시던 백사공(이항복)의 후손된 도리’라 하며 형제들을 설득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1911년 삼원보 대고산에서 만주의 첫 항일단체이자 민단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 신흥중학,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신흥무관학교는 10년동안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1919년 4월에 발족한 ‘서로군정서’와 11월에 발족한 ‘의열단’등의 핵심멤버가 되었다. 1922년 ‘통의부’, 1924년 ‘참의부’, 1925년 ‘신민부’, 1929년 ‘국민부’등의 무장투쟁 단체의 핵심에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있었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 10월 청산리전투는 이청천.이범석등 이 학교 교관출신들이 주도했다. 1940년 창설된 광복군의 총사령관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 제1지대장 김원봉, 제3지대장 김학규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선생은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4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흥선대원군의 난그림(석파란)을 그려 팔기도 했다. 선생은 1915년 이상설등이 주도한 고종 망명시도에 연류되어 구속되기도 했다. 선생은 1919년 고종의 장례를 앞두고 베이징으로 떠났다.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이후 베이징에서 임시의정원을 만들어 임시정부 체계를 만들기로 했다. 선생은 정부조직이 아닌 독립운동총본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되면 지위와 권력을 두고 서로 다투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독립운동은 각 단체의 자발성에 기초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정부조직은 자유연합적 성격을 띄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선생은 이승만.안창호의 외교론과 실력양성론에 맞서 무장투쟁론을 전개했다. 부인 이은숙도 내조에서 벗어나 운동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로 잠입하기도 하고 부군의 오해를 벗기 위해 단칼을 들고 행동하는 여걸이 되었다.

■ 아나키스트
 선생은 기질상 ‘반강권과 반권위주의, 자유와 자주’ 선호했다. 신채호는 일찍이 아나키스트가 되어 활동했다. 선생도 아나키즘을 수용했다.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을 경시하고 패권주의로 갈 수 있고, 공산주의는 그 안에 독재의 속성을 안고 있었다. 독립운동은 그 이념이 어찌됐든 일제 타도를 목적으로 하는 모든 단체의 자발성에 기초해야 하고, 이후 건설될 새조국은 ‘강제.강권.독점이 없는 민주사회’어야 했다. 민족주의 세력은 당시 외교론에 치중하고 있었고, 공산주의는 독립운동보다는 이데올로기 찬양에 열을 쏟고 있었다. 
 그러나 독립운동 진영에서 선생은 독보적인 통합력을 갖고 있었다. 황실과도 관계가 밀접해서 복벽주의자들도 설득할 수 있었고, 신민회 주도 인물로 공화주의 계열과도 친했다. 또한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경력으로 무장단체들을 설득할 수 있는 힘도 있었다.
 선생의 살림은 궁핍 그 자체였다. 오죽하면 나라를 팔아 먹은 ‘매국노’에 나라를 잃은 ‘망국노’가 있었겠는가. 여관비를 내지 못하고 야반도주할 때 여관 주인이 조선인들을 어찌 볼 것인가를 생각할 때 통분을 금할 길이 없었다고 한다.
 1930년대 선생이 노력한 아나키스트적 만주 운동단체가 일제에 의한 백색테러와 공산주의자에 의한 적색테러로 와해의 위기에 처했다. 1930년에 김좌진이 1931년에 선생의 제자 김종진이 살해된 것이다. 선생은 만주로 직접 가기로 한다. 지인들은 반대했으나 혁명가의 삶은 죽을 곳을 찾아가는 것도 있다. 1932년 11월 17일 선생은 밀정에게 정보가 누출되어 다렌에서 체포되고 고문 끝에 순국하신다. 시신은 뤼순 형무소에서 화장된다. 그의 나이 66세. 망명 22년이 지나가고 있을 때이다.
 
■ 친일잔재 청산
 1910년 망명한 가솔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맏형 건영은 병사했다. 자금을 책임진 둘째 석영은 굶어 죽었다. 신흥학교장인 셋째 철영은 병사했다. 여섯째 호영은 아들과 함께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들의 아들들도 대부분 망명지에서 죽음을 맞았다. 여인들의 고생은 오죽했을까. 다섯째 시영만이 살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했다. 우리가 아직도 여전히 친일 잔재를 청산하자하는 이유가 이 일가들의 삶에 있다. 말해 무엇 하겠는가. 3.1절 이회영평전을 읽으며 다시금 생각의 먼지를 털어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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