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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
필립 후즈 지음 『소년은 침묵하지 않았다』
책 익는 마을 원 진호
2020년 12월 08일 (화) 10:51:59 보령신문 webmaster@charmnews.co.kr
   

■ 덴마크 레지스탕스
 나는 일전에 『아버지에게 던지는 4가지 질문』이라는 책에서 16세 독일 소년의 참전기를 읽었다. 이 책은 나찌 강점기 덴마크의 14살 전후 소년들의 사보타지투쟁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죽음을 무릅쓴 상황에 이른 두 소년의 처지는 어떻게 달랐을가? 전자는 침략전쟁에 서고, 후자는 저항전쟁에 처해 있었다는 것. 독일은 덴마크를 침략했고, 덴마크는 큰 저항 없이 항복을 했으나 일부 시민들은 이에 저항을 했다. 전쟁에는 명분이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반전비공평화주의자인 묵자도 눈 앞에 닥친 전쟁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죄 없는 나라’를 공격하거나, ‘무도한 자들’이 공격해 오면 이를 피하지 말라고 했다. 이에 근거하면 독일 소년병은 불의의 편에 선게 되고, 덴마크 소년은 정의의 편에 서게 된다. 실제로 독일소년은 침략전쟁의 허위를 깨닫고 민주주의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를 배우게 된다. 덴마크소년은 비록 감옥에 갇히고 고초를 겪지만 자국민을 깨우고 연합군에게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런 해석도 독일 나찌의 패전이라는 결과 때문에 나올 수도 있겠다. 역사는 또한 알 수 없는 것이기에 교훈을 얻더라도 10%의 문틈은 열어 놓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입장이 다른 두 소년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공동체에 헌신하고자 하는 용기와 실천일 것이다. 문제는 어른들. 소년들이 이렇게 내몰릴 때까지 무얼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독일 나찌는 1차 세계대전 후 핍폐해진 독일 경제를 회복시키고 국민들의 자존감을 회복시켰다. 그런 그들이 왜 인종주의와 침략전쟁으로 빠져 나갔을까? 이유는 많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비판대안세력의 몰락이다. 견제 없는 통치는 독재로 나가는 것이니 라이벌이 없는 권력과 이념과 사상은 그 속성으로 몰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덴마크 어른들은 항복을 하고 저항을 주저했을까? 국토가 대부분 평지이고 독일과 인접국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판단이 섰을 것이다. 문제는 부역이다. 독일이 덴마크의 힘을 빌어 노르웨이를 치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이가 들면 매사에 주저와 염려를 많이 하게 된다. 저항에 쉽게 나서질 못한다. 그런 면에서 소년들과 젊은이들의 투쟁은 덴마크를 정의의 편에 서게 한 천만다행인 일이 된 것이다. 

■ 처칠클럽
 1940년에 덴마크 핀섬 북부에 위치한 오덴세라는 도시에 살던 14살 소년인 크누드 페데르센은 덴마크의 항복에 분노하고 노르웨이의 저항에 경외심을 갖는다. 모두가 침묵할 때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한 살 위 친형과 몇몇 학우들을 규합하여 사보타지 투쟁에 돌입한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가 나찌 표지판이나 시설물을 파괴하기등등. 나찌는 덴마크 경찰에게 이들을 단속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직접 나서겠다고 겁박했고, 경찰국장은 석달치 공장 임금에 해당하는 현상금을 걸어 이들을 수배했다.
 크누드 형제는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북쪽 도시인 올보르로 이사한다. 이 도시는 공항과 항만을 끼고 있어 노르웨이 침략의 전초기지로 독일 군인들이 많이 주둔해 있었다. 그들은 이 곳에서도 저항조직을 만들어 이름을 처칠클럽이라 했다. 그들은 총기류를 훔치기, 독일 군용차 방화, 부역 산업시설 파괴하기등의 활동을 벌였다. 42년 5월에는 철도 조차장에 들어가 화물차를 방화하는 작전을 펼쳤다. 이 것을 계기로 조직원들은 검거되고 2-3년의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페데르센은 출옥 후 저항군 조직에 들어가 활동하고 해방을 맞이했다. 이후 영국 처칠 수상을 만나는 등 나라에서 영웅으로 대접을 받았다.
 그는 미술을 계속 배웠고, 코펜하겐에서 회화 대여 도서관을 운영하였다. 유럽영화 학교도 세워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던 그는 2014년에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다른 단원들도 나름의 비극과 희극이 교차하는 삶을 살았고, 또한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인생에서 젊었을 적 행했던 조국의 독립을 위한 사보타지투쟁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 목숨을 건 투쟁이 자기 인생에 끼친 영향력은 컸을 것이라 생각된다. 해방 후 덴마크에서는 몇 주동안 1만 5천명의 부역자들이 고발 체포되고 그중 1만 3521명이 유죄, 46명이 처형당했다.
 
■ 카를 아우구스트 알그렌 묄레르
 는 페데르센과 같이 활동한 레지스탕스이다. 그는 적에게 발각되고 항전을 하다 쓰러졌다.  페데르센처럼 살아 영광을 누린 사람도 있지만 이렇게 죽어간 이도 있었다. 그들의 죽음이 또한 덴마크의 영광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산자는 결코 죽은 자를 잊어서는 안 된다. 해방 후 그의 시신은 군 비행장 묘지에서 처참하게 발견되었다. 그의 글을 인용해 본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저는 지금 죽으러 갑니다. 너무나 두려워요. 하지만 저는 기독교인으로서 그리고 전쟁 중인 덴마크의 국민으로서 죽을 수 있도록 제게 힘을 주시리라 믿어요. 하나님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축복하시길 기도합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고 잡히기보다는 죽는 게 낫다고 믿어요. 그들이 밖에 있고 저는 이제 그들과 맞서야 합니다. 하나님께 제 영혼을 맡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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