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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
홍성수 지음 『 말이 칼이 될 때 』
책 익는 마을 원진호
2020년 02월 25일 (화) 11:18:04 보령신문 webmaster@charmnews.co.kr
   

■ 혐오의 시대
 ‘말이 천냥 빚을 갚는다’, ‘빈말이 사람잡는다’등 말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다. 그러나 2013년 일베가 사회적 관심을 갖고,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이후 말이 사회적 담론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른바 혐오의 시대. 남성들의 여성 비하에 미러링으로 맞대응하는 메갈리안이 사회적 토론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우리의 언어도 유행이 있고 그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아니꼬운 사람이나 집단들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범주화 시키기 시작했다. 된장녀, 김치녀, 한남충, 맘충, 흑형, 틀딱충, 급식충등등. 사실 생각은 자유이기 때문에 상대에 대해 혐오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자유다. 문제는 이 것들이 표현되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것. 그렇다면 그 표현은 어떤 의미를 갖을까?
 책에는 혐오표현을 ‘소수자에 대한 편견 또는 차별을 확산시키거나 조장하는 행위 또는 어떤 개인,집단에 대해 그들이 소수자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멸시·모욕·위협하거나 그들에 대한 차별,적의,폭력을 선동하는 표현’이라 정의하고 있다. 혐오표현의 문제점은 그 대상에게 정신적 고통을 가하고, ‘누구나 평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공존의 조건’을 파괴하고, 실제로 그 표현이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진다는데 있다.
 혐오표현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다. 존엄은 관계의 친밀함에 안정성을 갖고 그 안에서 자신의 자율과 창의성을 펼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계의 소수자들에게 언어 폭력을 행사하면서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바로 그들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것이다. 존엄이 훼손된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쇠퇴와 몰락은 그 지점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우리가 쓰는 언어를 잘 다루어야 한다.
 또한 누구나 혐오표현에 자유로울 수 없다. 내가 상대방을 혐오한다면 상대방도 나를 혐오스럽게 표현해도 할 말이 없게 된다. 또한 나의 사회적 위치와 풍경에 따라 상황이 바뀔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백인 이외의 인종과 타민족을 비하하는 것이 자유라 생각하면, 유럽에서 내가 눈 찢어진 원숭이로 대접받거나, 혐한 일본극우들의 증오선동에 할 말이 없어지게 된다.  
 혐오에 대한 대책은 무엇일까? 우선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 또한 혐오표현의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표현할까?’를 궁구하고 일단 판단을 유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 당장 혐오피해를 당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 혐오표현의 수위와 대책
 혐오의 유형에는 고용과 서비스, 교육의 영역에서 소수자에게 수치심을 유발하는 경우, 또한 편견을 조장하고(동성애 퀴어축제 결사 반대. 인류생명질서, 가정,사람 질서 무너지면 이 사회도 무너진다), 모욕을 주거나, 증오를 선동(착한 한국인 나쁜 한국인 같은 건 없다. 다 죽여버려!)하는 것이 있다. 혐오에는 수위가 있다. 우리는 말이 광기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임을 역사와 생활 경험에서 알 수 있다. 편견이 혐오표현으로 드러나면, 이는 차별행위로 나아가고 증오범죄가 될 수 있다. 그 극단적 최후는 집단 학살이다. 
 하여 세계 각 국은 그 나름의 사정을 통해 차별을 금지하는 정책과 제도를 갖고 있다. 유럽은 좀 더 적극적으로 규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미국은 표현의 자유에 방점을 찍고 자율규제를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은 아직도 논쟁중에 있다. 이른바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논쟁. 장애인과 성차별을 둘러싼 제도 개선은 어느 정도 확립은 되어 있으나 일반적인 차별에 대한 입법은 지지부진이다. 이유는 동성애와 관련한 종교계의 반발이며, 입법 당사자들이 대다수 남성 기득권 계층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 자체가 사회적 여론을 환기하고 차별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향후 이 입법 과정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토론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면 좋겠다.

■ 혐오표현에 중립은 없다
 책을 읽으며 얼굴이 화끈함을 느꼈다. 나는 이런 표현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난 중립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선량한 시민’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진보는 주변과 소수에서 치고 올라오는 것이라 믿고 있다. 사회의 다양성은 소수자들의 존재를 인정할 때 가능하고 그 다양성이 사회적 역동성을 높이고  변화 적응과 창조적 발전에 밑거름이 될거라 확신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책은 나에게 ‘지금 당장 뭐할건데’를 묻는다. 내가 일상적인 생활에서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위나 말이 편견과 차별의식인지 되돌아 보고 혐오표현에 당당히 맞서고 있는지를 되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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