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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중동태의 세계>
책 익는 마을 원 진호
2019년 07월 15일 (월) 11:33:28 보령신문 webmaster@charmnews.co.kr
   

■ 능동태와 수동태
 ‘나는 걷는다’ 능동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저자는 뇌과학의 성과를 들어 의식이 일일이 걷는 동작을 지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다양한 조건과 상황에 따라 걷는 것이 선택되는 것이다. 즉, ‘나에게 보행이 실현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나는 사과한다’도 그렇다. 행위에 맞춰진 능동의 표현도 본질적인 사과의 의미에 맞지 않다. ‘나의 안에서 사과의 심정이 나타난다’로 해야 진정 사과다. 속으로는 사과의 마음이 없이 말로 사과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언어는 ‘하다’, ‘당하다’처럼 행위의 능동과 수동으로 깔끔하게 정리한다. 언어는 우리의 사고와 활동을 반영하면서 또한 규정한다. ‘나는 걷는다’가 실제로 능동이 아님에도, ‘나는 사과한다’처럼 그 안에 수 많은 스펙트럼이 존재함에도 우리에게 간단하게 정리함을 요구한다.

■ 의지와 책임  
 능동태와 수동태 어법이 행위의 방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행위에는 의지가 관여한다. 행위는 책임을 동반한다. 하여 애초에 의지가 있고 행동이 있으며, 그에 따라 책임이 있다. 능동태와 수동태가 지배하는 세상에는 이렇듯 의지가 중요하다. 의지가 있으면 능동이고 의지가 없으면 수동이 된다. 의지가 없는 수동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고 의지가 있는 능동은 책임여부를 따져야 한다. 그러나 의지가 모든 행동에 앞서 나타날까?
 여기 수업에 조는 학생이 있다. 선생이 왜 졸았냐고 묻는다. 학생이 답한다. 밤새 게임을 해서라고, 이건 어떤가. 가족을 위해 밤새 아르바이트를 하고 와서 그렇다고. 선생은 전자에게 의지가 약해서라고 비난하지만, 후자에게는 그렇게 대 놓고 말하지 못 한다. 즉 우리는 ‘책임을 지워도 좋다는 판단 하에 전자는 의지가 있다고 보고 후자는 수동적일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 중동태
 저자는 언어의 역사를 살피면서 이렇게 말한다. 애초에 중동태가 있었다고. 그는 인도-유럽어(BC 3000년전 남부러시아,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분화된 언어)를 분석했다. 가설은 이렇다. 처음엔 명사가 있었고, 후에 동사가 출현했다. 원시 동사는 사건을 나타내는 비인칭 동사였다. 동사가 인칭을 획득하면서 태가 생겼고, 능동과 중동의 언어 체계가 완성됐다. 중동태는 이후 완료형과 자동사, 수동표현으로 분화되었다. 그 중 하나인 수동표현이 강해져서 중동태를 몰아내고 능동과 수동태의 세계를 구축했다. 중동이란 표현도 태초에 없었으나 능동과 수동의 대립세계가 완성된 후 사후적으로 명명된 것이다.
 수동과 능동의 대립에서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중동과 능동의 대립에서는 ‘주어가 동사에 의해 제시되는 과정의 바깥에 있느냐 안에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스어 ‘뤼에이’는 줄을 푼다는 능동태고 ‘뤼에타이’는 중동태다. ‘말을 줄에서 푼다’라는 문장에서 두 단어는 같이 쓴다. 그러나 의미는 틀리다. ‘뤼에이’는 단지 말을 줄에서 푸는 것이고, ‘뤼에타이’는 자신을 위해 말을 줄에서 푸는 것을 의미한다.

■ 의지와 선택
 권총을 든 사내가 나에게 지갑을 내 놓으라고 위협했다. 나는 그에게 지갑을 건네 주었다. 자, 나의 행동은 자발적인가? 비자발적인가? 농동과 수동의 관점에서는 자발적인 것이다. 행위에 강제가 없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가 그렇게 주장했다. 푸코는 권력 개념을 들어 자발적이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비자발적이었느냐? 이거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를 능동과 중동의 관점에서 보면 설명이 쉽다. 이 상황은 ‘강제는 없지만 자발적이지 않고, 자발적이지 않지만 동의는 하고 있는’거라고. 능동과 수동의 관점은 딱 부러지는 정리를 요구하지만 중동의 세계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포용한다. 하여 중동의 세계는 의지와 책임보다는 선택과 자유, 상황과 맥락의 이해, 단수성보다는 복수성, 다수성을 존중한다.
 왜 세상은 중동을 물리치고 능동과 수동의 체계를 완성했을까? 그건 아마도 그렇게 하는 것이 살기 편했기 때문일 것이다. 통치하기 쉽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의지가 있다고 믿고 행위의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할 수 있으니까 법률도 만들기 쉽고 질서의 기준도 유유부단하지 않았을 터다.

■ 중동의 세계
 그렇다고 세상이 단순하고 편하게 펼쳐지던가? 아니다. 중동의 세계는 사실 우리의 일상이다. 다만, 언어로 정리되는 능동과 수동의 체제에 밀려 무화될 뿐이다. 다랑이 논은 있어도 정책과 제도는 경지정리된 논만 논으로 다루는 것과 같다. 우리의 일상과 정신 세계는 다랑이 논과 같다. 우리는 어쩌면 세상이 그려논 수동과 능동의 질서에 우리의 창의와 자발를 억지로 꿰맞추고 있는지 모르겠다. 소설 <빌리들의 이야기>에 대한 저자의 독법을 읽으며 인간은 ‘생각하는대로 행위할 수 없는’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과악의 대립으로 모든 이야기를 읽는다. 모든 고전 소설이 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그렇게 배우지 않았던가. 존엄있게 산다는 것은 언어의 비의에 도전장을 내는 거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빛나는 영감을 던져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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