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 양옆으로 이어진 농로를 따라, 마치 크기를 맞춘 듯 반듯반듯하게 정리된 논들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어느새 부지런한 농부의 논에는 어린 모들이 아주 예쁜 모습으로 심어져 있고 아직 채워지지 않은 이 너른 흙빛의 논들은 머지않아 푸릇한 모들로 가득 채워져 보는 이들로 하여금 풍요로움을 갖게 할 것이다.
여유로움 없이 꽉 짜여진 농부들의 고된 일상.
그들이 견뎌야만 하는 어려움의 강도와 그로 인해 흘려지는 값진 땀방울만큼 넉넉한 수확의 결실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여기, 한 농부가 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쉴 사이 없이 일을 해야 하는 사람. 바로 이병하씨(54세, 성주면)이다.
여느 농부들과 다를 바 없는 그의 삶, 그러나 그가 짊어져야 할 어깨의 짐은 다른 농부, 아니 다른 많은 사람들의 어깨에 지어진 무게보다 훨씬 그 강도가 크다. 그로 인해 그는 너무나 힘겹고 어려운 시간들을 보낸다. 그리고 또 앞으로도 그 어려움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삶 자체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열심히 생활하려 노력하고 있는 이씨를 오늘 이 사람으로 소개한다.
그가 짊어져야 할 어려움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욱 벅찬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바로 이것이다.
그 자신도 지체 3급의 장애인이며 그에 더해 지체 1급 장애인인 부인과 뇌졸중으로 병석에 누워 있는 팔순 노모를 모시고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긴 시간 어려웠었고 또 앞으로도 지나온 시간만큼, 아니 더 오랜 시간 동안 힘겨울 수도 있는 그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이씨가 장애를 앓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이다.
5남매 중 장남이었던 이씨는 초등학교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한 쪽 다리에 이상을 느꼈으며 그 후 차츰차츰 두 다리로 걷는 것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관절염으로 인한 장애라고 했어요. 한 쪽 다리가 쭉 펴지지 않고 움추러 들더군요."
지금처럼 의료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때, 이씨도 의료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상태로 움추러 진 다리를 장애로 끌어안아야 했다.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학교를 포기했었어요. 2-3년 후 한글은 깨우쳐야 한다는 선생님의 권유로 다시 학교를 다녔죠."
그러나 이씨는 끝내 중도에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집에서부터 그 당시 도화담 초등학교까지는 너무 먼 거리였고 불편한 다리로 차편 마저 용이하지 않았던 그 곳까지 걸어 다닌다는 것이 무리였기 때문이다.
그 후 이씨는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생활하던 부친을 도와 농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책가방 대용이었던 보자기에 책이며 책받침, 필통, 그리고 어머니가 정성 들여 싸준 도시락등을 챙겨 먼길이지만 신나는 걸음으로 학교에 가야 할 때 였고, 사이사이 쉬는 시간 흙먼지를 일으키며 운동장에서 뛰어 놀아야 할 때 이씨는 농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내게 주어진 삶이라면 받아들이고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제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면 부모님 마음이 더 아프실까봐 조심스러웠습니다."
그 후 그의 다리는 점점 움추러 들었고 절뚝이게 됐다. 또한 일을 하면서도 비장애인들보다 몇 배 더 힘들어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마음을 숨긴 채, 농사일을 열심히 배웠다. 살아가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말이다.
"25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고생만 하셨죠."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씨는 부친의 일을 물려받았으며 비록 자신의 몸이 불편했지만 최선을 다해 농사일을 해 나갔다. 일을 좋아하고 부지런했던 그의 모친과 함께 말이다.
그 후 80년도, 그는 최인자(50세)씨와 결혼을 했다.
"아내는 저 보다 더 심한 지체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아내인 최씨는 두 다리를 사용할 수 없는 지체 1급 장애를 앓고 있었다.
방과 마루 등 팔로 짚고 다닐 수 있는 곳 외에 혼자서는 밖으로 나갈 수 조차 없는 심한 장애를 앓고 있었다.
"어머니가 건강하셨습니다. 결혼 후 19년여 농사일은 물론 대천 장을 다니시면서 시장도 보시고 살림도 맡아 해 주셨죠. 그런데…."
자신도 불편한 몸이면서 그 자신보다 더한 장애를 앓고 있는 부인을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닌 아들을 안쓰럽게 바라보아야만 했던 어머니 임영애(현 81세)씨.
부지런하고 깔끔했던 이씨의 어머니 임씨는 며느리를 대신해 노령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하게 살림이며 농사일을 기꺼이 해 주었다.
"어머니께서 고생 많이 하셨어요. 남은 여생 편하게 사셔야 하는 데…"
이들 가족이 겪어내야 할 고통의 끝은 어디일까?
이씨 자신과 부인이 장애를 안고 생활하는 것도 모자라 8년여 전 두 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그로 인해 막내동생은 사망했으며 바로 밑 동생은 8년째 누워서 생활하고 있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그렇게 바지런하고 깔끔했던 어머니 임씨가 너무 많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3년 여 전 뇌졸증으로 병석에 눕게 되기에 이르렀다.
그로 인해 이씨는 중풍으로 쓰러져 거동을 못하는 어머니 임씨의 식사수발은 물론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 입히는 일, 그에 더해 적적하고 소외된 느낌을 갖지 않도록 하루의 일과와 이웃집의 소식도 소상히 전해 주는 일 등을 3년여 계속해 왔다.
"일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던 어머니셨어요. 그래서 일을 못하시니까 너무 답답해하시죠."
아들 이씨의 정성은 어머니 임씨의 병환을 호전케 했으며 현재 임씨는 주변의 도움 없이도 자리에서 일어나 식사도 손수 먹을 수 있으며 깔끔했던 성품만큼 머리를 곱게 빚을 수도 있게 됐다.
"아들을 보면 너무 안쓰러워요. 어렸을 때부터 너무 착한 사람이었는데,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몸이 불편해도 아등바등 살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라도 살 수 있는 거예요."
이씨는 불편한 몸이지만 그 어느 누구에 비교되지 않을 만큼 모친을 위해 정성을 다했다.
그래서 이웃 주민들은 "효자 아들 덕분에 빠르게 건강이 회복된다"고 칭송이 자자하다.
가족 3명이 지체장애를 가지고 있는 가정의 가장 이씨.
자신이 처한 상황에 굴하지 않고 하루하루 삶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이병하씨.
부인의 몫인 가사일과 어머니의 병수발, 농사일 등 하루도 쉴 틈 없이 바쁜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성주면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꽃길 가꾸기 사업에 동참하는 것은 물론 자신보다 더한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격려하며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영세민보조를 받고 있었는데, 큰 딸이 직장을 얻게 되면서 보조가 끊겼어요. 딸은 이제 신입사원이고 그 월급으로 장애인 3명의 약값을 대기도 너무 어렵게 되었어요. 병원을 갈 엄두가 나지 않아요. 그래서 요즘 걱정이 앞섭니다."
이씨와 부인 최씨는 1남 1녀를 두고 있다.
장애인 부모 밑에서 자칫 잘못된 생각을 가질 수 있었던 청소년기를 잘 지내준 아이들.
큰 딸은 몸이 불편한 부모를 대신해 살림이며, 할머니 수발을 도왔으며 얼마전 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가까운 곳에 직장을 얻어 일하고 있다. 또한 아들은 취직 준비중이다.
불편한 몸이지만 소탈한 성격 탓에 동네 친구들이 유난히 많다는 이씨, 그리고 그의 착한 성품을 닮은 자녀들.
얼마전 제29회 어버이날을 맞아 이씨는 장한 어버이 도지사 표창을 받았다.
이씨처럼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마음속 큰 장애를 가지고 생활하는 많은 사람들.
그에 비해 겉으로 표현되는 장애를 가졌다해도 성실함과 넉넉함, 경로 효친을 실천하며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이씨.
정신건강이 약한 사람들이 그에게서 생활의 최선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지극한 효성과 헌신적인 사랑으로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만들어 가는 이병하씨의 삶은 겉으로 화려하지 않았지만 가슴속 사랑을 심어주는 그런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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