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2.19 화 16:44
의정비, 시립노인병원
 
> 뉴스 > 교육/문화
     
[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
최규진의 <세상의 배경이 된 의사>
책 익는 마을 원진호
2019년 01월 28일 (월) 11:31:55 보령신문 webmaster@charmnews.co.kr
   

■ 고 배기영
 한 출판사에서 북펀딩 홍보를 하는 것을 보고 참여했다. 한 의사가 신장암으로 하늘 나라로 갔고 남은 지인들은 힘을 합해 그를 기리려 한다. 정작 그가 세상에 내 논 흔적은 별로 없다. 사진도 없고 글도 없고 연설도 없다. 정치, 사회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TV와 언론에 이름을 장식하지도 않았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단지 그를 ‘느낌’으로 일고 있을 뿐이다. 평범함. 그래 그는 평범함 사람이었다. 그의 평전을 쓴 작가는 그 ‘평범함’에 주목했다. 그는 가족과 직장, 사회에 자신이 할 수 있고, 아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거나 의존하지 않고 묵묵히 일을 해 냈다. 화학반응이 일어날 때 촉매 역할을 하고, 생합성 과정에 조효소 역할을 하는 사람. 결과를 끌고 가는 사람은 아니지만 결과에 영향을 끼치는 배경이 되는 사람. 배기영은 그런 사람이었다. 저자가 고인을 말하면서 인용한 안도현의 <연어>의 문장이 마음에 새겨진다.
 ‘살아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 주는 일이다. 별을 더욱 빛나게 하는 까만 하늘처럼, 꽃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무딘 땅처럼..’

■ 의사 배기영
 그는 정신과의사다. 대학에서 수련을 받고 1985년 마포에 정신과의원을 개업했다. 87년 6월 항쟁의 힘을 얻어 그해 11월 21일에 <인도주의 의사 실천협의회>가 발족했다. 그는 이 회에 가입하고 진료부장을 맡아 상계동 진료봉사활동을 시작했다. 1994~96년 동안 대표를 맡아 인의협을 전국 조직으로 키웠고, 전공의협의회 준비모임의 산파 역할을 했다.
 90년대 공안정권 시절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을 치료했다. 특히 86년 10월 노동운동 관련하여 구속되어 고문 당한 문국진은 국가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승소했다. 고문에 의한 정신피해에 국가가 배상하도록 한 결정적 계기는 배기영의 지속적인 정신과 진료가 근거가 되었다.
 한총련이 이적단체가 되고 200여 명의 학생들이 수배가 되었다. 인의협은 정치 수배자들을 위한 공개 건강검진을 실시하였고, 배기영은 516개 항목에 달하는 다면적 인성검사를 실시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많은 학생들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음을 알렸다. 이들의 건강문제는 검찰의 불구속 기소의 명분이 되어 사실상의 수배해제 효과를 냈다고 한다.
 청구 성심병원 노조탄압 사건이 98년도에 있었다. 법원은 해고된 조합원을 원직 복귀토록 명령했다. 그러나 사측은 복직된 조합원을 조직적으로 왕따를 시켰다. 이런 상황에 일 년 반을 버틴 한 조합원을 배기영이 진료했다. 다른 조합원에 대해서도 정신과 면담을 가졌다. 이들은 산재공단에 산재신청을 했다. 그리고 이겼다. 사측의 노동조합 탄압으로 인한 집단 정신 질환이 산재로 인정된 첫 사례였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직업병의 범위를 심리.정신 영역까지 넓히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배기영은 개업한 후 시작한 첫 사회봉사활동은 ‘사랑의 전화’였다. 매주 토요일 오전 진료후 달려간 그는 20년 이상 무료 상담을 했다. IMF후 서울역 지하도는 노숙자로 넘쳐 났다. 인의협은 이들을 위해 무료진료활동을 시작했다. 배기영도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노숙인들은 일반인에 비해 정신장애 유병율이 두 배, 알코올 의존과 남용이 세 배나 높았다. 배기영의 역할이 그 곳에 있었다. 2008년 보령의료봉사상을 받는 시상식에 그는 참석하지 않았다. 노숙인 진료 시간과 겹쳤기 때문이다.
 95년도 정신보건법이 제정되었다. 배기영등 젊은 정신과 의사들은 정부와 보수적인 학회에 맞서 환자의 인권과 지역사회 중심의 정신보건에 맞는 법이 제정되도록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97년 ‘북한 어린이 살리기 의약품 지원 본부’활동에 적극 참여 하였다. 그는 2004~ 2014년간 지원본부 이사를 맡아 제 역할을 다 했다.

■ 인간 배기영
 그는 운동가 출신이 아니다. 기독교인이고 예수의 삶을 따라 실천했을 뿐이다. 빛과 소금. 자신을 태우고 녹이여 ‘타인을 이롭게 하기 위한 삶’을 살았을 뿐이다. 남의 말을 경청했고, 동시에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그. 자신의 종교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종교적인 삶을 실천했던 그. 1953년 6월. 북한 피난민으로 내려온 부모가 거제 장승포 피난민 수용소에 그를 낳았다. 그리고 2015년 5월말. 신장암으로 투병 중 가족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숨을 거두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보령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 보령신문(http://www.charmnews.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기사의견쓰기는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가장 많이 본 기사
'금품전달' 폭로…대천농협 홍역 앓
축제관광재단 의혹, 이렇게 묻히나?
오천농협 선거, 새국면 맞아
농협이사 선거, 어떻게 치러지나?
[박종철 칼럼]인간 말종들의 ‘정치
"대천농협은 자정능력 상실했다"
시, 통일된 계량용기 보급나서
"혼신의 노력 기울였다"
보령시 여성단체, 신년교례회 개최
시, 올해도 스포츠마케팅 나선다
 
우편번호 33436 충남 보령시 신설 3길 11, 1층(동대동, 모스트센터) | Tel: 041)936-0005 | Fax:041)935-1356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연중
Copyright 2009 보령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jong861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