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은 정월 대보름이었다.

농촌에서는 그렇지 않겠지만 도시 사람들에게는 지내놓고 보니 엊그제가 정월 대보름이었구나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개가 밥을 얻어먹지 못하는 날이라 ‘개 보름 쇠듯한다’ 는 속담도 있지만, 음력이 천대를 받는 요즘 같아서는 사람이라고 별다른 보름 쇠기가 만만치 않다.

날이 갈수록 우리고유의 세시풍속은 아득한 기억 속에서나 찾을 수 있게 되었으니……

오는 2월 14일은 ‘연인의 날’ 로 알려진 ‘발렌타인 데이’다. 이 날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설은 없지만 서기 269년 2월 14일 순교한 로마의 성인 발렌타인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국에서는 겨울잠에서 깬 새들이 2월 14일을 기해서 사랑을 시작한다는 속전(俗傳)이 있는데, 이 속전과 발렌타인의 순교일이 우연히 맞아 떨어져 연인의 날이 됐을 것이라는 게 이 날의 기원이다.

그래서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소수의 나라에서는 카드와 초콜릿을 연인에게 선물하는 풍속이 있지만 정작 발렌타인의 고국인 이탈리아에는 그런 습속은 없다.

이날 초콜릿을 선물하는 것도 그 원천을 따지고 보면 불순(?)하다. 초콜릿의 원료는 카카오인데, 그 원산지인 멕시코의 아즈텍인들에게 최음약(催淫藥)이었고, 18세기 유럽에서는 색남(色男) 카사노바가 초콜릿을 먹여 부인들을 유혹한 것이 뿌리가 되어 ‘은밀한 침실의 묘약’ 으로 알려져 유럽의 상류사회에선 내놓고 먹을 수 없는 금단의 식품이 돼 있었다.

그런데 이 초콜릿을 장사 잇속이 밝은 일본인들이 발렌타인 데이와 결부시켜 사랑의 선물로 둔갑시킨 것이다.

문제는 무분별한 장사꾼들의 상혼(商魂)이다.  일부 백화점이나 제과점에서는 법석을 떨며 특설코너를 설치, 분별없는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자극, 유인하고 있다.

보도에 의하면 수십 억원 대의 초콜릿이 수입되고 하나에 수만원 씩하는 초콜릿까지 나왔다고 하니 대단한 발렌타인 광기(狂氣)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연인의 날이 꼭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우리의 전통사회에서도 찾아 부활시킬 수 있다.
이를테면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정월 대보름의 ‘탑돌이’ 는 우리 고유의 발렌타인 데이 풍속이었다. 남녀가 탑을 돌다가 눈이 맞아 마음이 통하면 사랑을 나누었던 신나는 축제날이었던 것이다.

벌레들이 겨울잠에서 깨어 일어난다는 경칩(驚蟄)날도 연인의 날이었다. 이날 처녀 총각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동구 밖에 있는 은행나무를 도는 것으로 사랑을 증명하고 또 정을 다지기도 했다. 달콤하지만 입안에서 금방 녹아 없어지는 초콜릿 같은 사랑이 아니라 쓰지만 영원히 변치 않을 은행(銀杏)나무 같은 사랑을 나누었으니 우리 조상들은 정말 낭만적이었다.

또 칠석(七夕)날도 있다. 이날은 견우와 직녀가 은하를 가로질러 1년만에 상봉하는 날이다. 이날 밤 처녀들은 ‘걸교(乞巧)’ 라 해서 반원형의 달떡을 빚고 베 짜고 바느질하는 솜씨가 좋아지게 해달라고 비는 민속이 있었는데, 이것은 명분이고 실속은 마음먹은 사람을 움직이게 해 달라거나 시집가게 해달라는 사랑의 기도였음이 우리의 옛 잡가(雜歌)나 속요(俗謠)에 보면 잘 나타나 있다.

나라가 아무리 부유해도 민족정신이 사라지면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청소년은 민족이 미래다. 우리 청소년들이 민족 고유의 풍속을 개량 계승해 정월 대보름이나 경칩·칠석 등을 ‘우정과 사랑의 날’ 로 기념하여 부럼(땅콩, 밤, 호두 등)을 선물하거나 지난 가을에 책갈피에 넣어 말려둔 은행잎에다 사랑의 시를 적어 전하고, 신토불이한 은행 알을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랑의 징표로 선물하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