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3 목 08:19
의정비, 시립노인병원
 
> 뉴스 > 오피니언/정보
     
[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
전쟁과 의료윤리검증추진회의 <731부대와 의사들>
책 익는 마을 원 진호
2018년 05월 22일 (화) 13:44:58 보령신문 webmaster@charmnews.co.kr
   

■ 731부대, 관동군 방역급수부
 이시이 시로라는 의사가 있었다. 1920년 동경의대를 졸업하고 1930년에 육군 군의학교 교관이 되었다. 생물병기에 관심이 있었고 1932년 방역연구실을 개설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고 1939년 하얼빈 남동쪽 15km 핑팡에 731부대가 창설되었다. 그는 부대장이 되었다. 부대는 총면적 80km2, 1945년 1월 현재 장교 133명 포함 2,009명이 근무했다. 의사는 패전 직후 도일한 인원이 53명으로 되어 있다. 부대 업무 특성상 의사들이 핵심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부대로 적어도 3,000명 이상의 인체 실험자(일명, 마루타)들이 이송되었고, 그들 중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전쟁기간 마루타와 세균전 희생자는 수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체 실험의 피험자들은 주로 반만주 항일 운동가였고, 중국인,러시아인,조선인들었다.  

■ 생체 실험
 731부대는 만주 지역에 5개 지부를 두고, 2개의 야외실험장을 두었다. 부대는 8부로 구성되었고 1~4부가 핵심이었다. 제1부는 세균연구부, 제4부는 세균제조부였다. 이들이 만든 세균은 페스트, 티푸스, 콜레라균이었고 페스트균은 실제로 중국 여러 지역에 살포(1940~42년사이 6개 작전지역에 살포된  페스트 감염 벼룩과 관련, 2차 감염까지 포함 25,964명이희생)되었다. 제2부는 실전 연구부서로 페스트균을 감염시키는 벼룩을 번식시켰다. 제3부는 이시이식 정수기 제조부서였는데 페스트균을 넣는 도자기 폭탄을 만들었다.
 731부대가 시행한 인체 실험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시행되었다. 세균독력시험은 물론 동상실험등이 이루어졌다. 실험 후 살아 남은 사람들은 다 살해되었다.
 군국의 시대. 일본 의학은 이에 철저히 복종했다. 생체 실험은 비단 731부대에서 뿐 아니라 의과대학, 병영,형무소에서 일어났다. 1945년 5월에서 6월사이에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에선 미군포로 대상으로 수술 실험이 이루어졌고, 육군 병원에서도 초임 군의관의 경험을 얻기 위해 포로를 대상으로 생체 실험이 이루어 졌다. 시인 윤동주도 후꾸오까 복강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받고 죽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 패전 후 은폐, 면책
 이시이는 패전 후 남아 있던 404명의 인체 실험자들을 가스로 살해하고, 문서를 소각시켰다. 부대원들에게 함구를 명령하고 발설시 끝까지 쫓아가 응징하겠다고 말했다. 일본 군부는 국체 수호와 국제적 비난을 면하기 위해 은폐 작업을 시도했다. 미국은 생체 실험 자료를 받는 대신 관련자들을 전범에서 제외시켰다.
 1949년 03월 30일 일본의사회 대의원회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의 의사들을 대표하는 일본의사회는 이 기회에 전쟁 중 적국 국민에 대해 가해진 잔학행위를 공식적으로 비난하고 단죄하며, 이미 발행했다고 알려져 있는 환자에 대한 잔학행위를 규탄한다.’ 대단히 두루뭉실한 과거사 반성이다. 이후 일본의사회는 세계의사회에 가입을 승인받았다. 그러나 조직적으로 전쟁범죄에 관여한 의사들에 대한 단죄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들은 이후 주류 사회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우리나라 박정희정권은 731부대 관련자인 카토 카쓰야에게 대한민국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 의사들은 왜 비윤리적 행동에 참여했는가?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당시는 ‘전쟁상황’이라는 것. 연구자로서 ‘일반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좋은 연구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매력. 또한 이를 수단으로 개인적으로 출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욕망이 그 원인일 것이다. 당시 인체 실험은 첨단 연구였을 것이고, 그러한 인식이 ‘윤리규범’으로 방해받지 않았을 것이다.

■ 전쟁범죄와 의료 윤리
 ‘전쟁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국제법은 ‘상관의 명령이 민법,군법에 위배된 것을 알았다면 명령에 따른 부하도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되어 있다. 자신의 도덕적 판단을 명령에 맡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도 “ 정부나 혹은 상관의 명령에 따라 행위를 한 자는 도덕적 선택이 현실에서 가능했을 때는 국제법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 책임자 처벌의 중요성
 그렇게 해야 후손들에게 똑 같은 상황이 벌어질 때 명분을 쥐어줄 수 있다. 상황논리가 용인되면 전쟁범죄가 또 일어난다.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선조가 단죄를 받지 못했다면, 또한 그가 반성과 용서를 빌지 않고 제 수명을 다 살고 죽었다면, 후손이 어떻게 용기 있게 똑 같은 상황에서 전쟁범죄를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보령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 보령신문(http://www.charmnews.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기사의견쓰기는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가장 많이 본 기사
"서울에서 천북까지"
대천리조트 매각, 어디까지 왔나?
또 이곤순 서예관 추진 '논란'
오서산에 늑대가 살았다!
공직자는 '만족', 시민은 '불만'
8대 의회, 첫번째 행감 마무리
"빗물저금통, 알고 계세요?"
[박종철 칼럼]‘보령시지속가능발전협
"보령도 농민수당 도입해야"
올 한해 시정 10대 뉴스 선정
 
우편번호 33436 충남 보령시 신설 3길 11, 1층(동대동, 모스트센터) | Tel: 041)936-0005 | Fax:041)935-1356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연중
Copyright 2009 보령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jong861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