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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
김형목의 <김 광제, 나랏 빚 청산이 독립국가 건설이다>
책 익는 마을 원 진호
2018년 04월 17일 (화) 11:25:13 보령신문 webmaster@charmnews.co.kr
   

 보령 동대사거리에는 김광제선생의 동상이 있다. 선생은 대한제국시절 국채 보상운동의 불을 지핀 분이다. 1866년 7월 1일 남포군 웅천읍 평리에서 태어났고 1920년 55세에 대구에서 돌아가셨다. 지역에서는 <독립지사 김광제기념사업회>가 활동하고 있다. 동상제막과  책 출판은 그 활동의 결과라 볼 수 있겠다.
선생의 일생은 크게 유, 청년기와 관직생활, 재야시절로 나눌 수 있다. 재야시절은 상소운동시기(1905년까지)와 국채보상운동을 정점으로 한 애국계몽운동기, 1910년 경술국치 후 마산에서 활동한 출판운동시기로 나뉘어 볼 수 있다.

■ 유년기, 청년기, 관직 생활
 선생은 남포에서 성장하면서 정통 유학을 공부했다. 충청도 유학은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기호학파의 범주에 속한다. 보령지역 성리학은 율곡 이이와 우암 송시열을 계승한 남당학파와 최익현과 윤석봉을 따르는 화서학파가 있다. 남당학파는 외세를 오랑캐로 보고 배격하는 정치적 입장을 견지했다. 화서학파는 성리학적 의리론을 중시하여 수신을 강조했다. 이러한 학통은 향후 위정척사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선생은 1888년에 무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벼슬길은 순탄치 않았다. 1902년 10월 정 3품 직급을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1894년 갑오농민봉기가 있었다. 선생은 보부상 중심의 민보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에 대항하였다. 농민봉기를 '무뢰배에 의한 국난'으로 보았다. 1895년에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투쟁이 일어났다. 이세영이 남포에서 기의를 했는데 이때 선생도 참여했다. 1896년 08월에는 개화당명부를 확보하고 박제순등이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고변사건에 동참하기도 했다.

■ 재야시절- 상소운동 시절 1905년까지
 대한제국이 1897년에 선포되었다. '광무개혁'이 관주도로 진행되고, 1898년에는 재야를 중심으로 만민공동회 운동이 전개되며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선생은 사회 안정을 위한 호패법 제정에 호패가 아닌 호표로 하자는 상소를 하였다. 외국화폐의 유통 반대를 주도하는 공제소의 총무를 맡기도 했다. 1905년 12월에 지배층의 외세의존적인 자세와 가렴주구에 대한 비판을 담은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 일로 선생은 고군산도로 유배를 떠났다. 을사늑약이후 자결한 민영환를 기리는 <민충정공혈죽>이라는 시를 1906년 대한자강회 월보에 실었다.

■ 재야시절- 1910년까지. 애국계몽운동시기
을사늑약이후 대구로 이사 온 선생은 사립학교장과 대구광문사(교과서 발간.보급)사장을 맡았다. 대구 자치제 시행을 위한 대구민의소를 조직했다. 권학과 산업육성을 위한 대중 연설을 다녔다. 러일전쟁 후 제1차 한일협약의 체결로 차관 공세가 강화되었다. 그 차관은 일제의 식민수탈 기반을 닦는데 쓰였다. 1907년 경 국채는 1,300만원 정도. 당시 대한제국 수입재정이 1.318만원이었다. 1907년 1월 29일 선생과 서상돈이 대구광문사 특별 모임에서 발의하여 국채보상운동의 서막이 열었다. 선생의 연설은 호소력이 있었다.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번져 도둑과 거지등도 의연금을 낼 정도였다. 모금한 총액은 27만여원 정도, 일제의 방해 책동으로 1907년 6월 이후는 모금이 진척되지 않았다. 1909년 11월 국채보상금처리회가 만들어졌으나 실효적이지 못했다. 결국 모금액 15만원은 경술국치후 경무총감부에 빼앗겼다.
?선생은 서울에서 조직된 대한 자강회에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교육진흥과 식산흥업을 표방하였다. 대한자강회는 헤이그밀사사건과 군대해산등을 계기로 해산 당했다. 이를 계승한 단체가 대한협회였다. 선생은 국채보상운동이 침체기에 빠지면서 서울로 활동을 옮겼다. 이 단체에 가입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명강연을 하였다. 근대 교육 활성화를 위한 학회활동과 노동야학회도 활성화되는데 선생은 여기에도 적극 참여를 한다. 지금의 도서관인 서적종람소도 만드는데 앞장섰다.

■ 재야시절- 경술국치이후
 선생은 마산에 정착했다. 출판, 문예활동을 열성적으로 벌였다. 식민지 산업이 발전하면서 노동자층이 형성되었고 선생은 그들의 단결과 교육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0년 2월 16일 조선노동대회 발기회를 개최하고 단장에 취임했다. 선생은 각종 강연회에 참석했고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활동했다. 고학생 모임인 갈돕회 고문도 맡았다.?1920년 07월 24일 급작스런 복통을 호소하며 쓰러지셨다. 향년 55세.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기며 보령시민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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