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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실록(實錄) - 조선왕조실록속의 보령13]과거(科擧) ③
2015년 06월 30일 (화) 15:48:14 이후근 기자 webmaster@charmnews.co.kr

시험을 통해 관리를 뽑는 방식이 요즘에는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유교문명의 발상지인 중국은 물론 한반도의 고대 왕조들에서도 시험 없이 관리를 뽑았다. 적어도 중국에서는 수나라 이전, 한반도에서는 고려 광종시대 과거제도가 시행되기 이전에는 그랬다.

과거제가 시행되기 이전에는 주로 귀족의 자제나 전쟁 등을 통해 공을 세운 사람과 그가 추천한 인물들을 관리로 뽑았다. 비록 다수는 아니지만 지방에서 관리나 백성들이 천거한 인물 등을 관리로 등용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고대 봉건국가의 틀을 벗고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실현하고자 했던 정치세력은 당연히 과거제를 고안하고 선택했다. 지방에서 할거하는 호족세력을 누르고 자신의 세력을 심고자 했던 수나라의 문제나 고려 광종이 그랬다.

과거제를 도입한 전제왕권은 시험을 통해 선발된 관리들에게 행정·정치적 권한을 부여했다. 관리들이 귀족보다는 정치적 권력을 안겨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더욱이 과거제도는 귀족 이외의 신분계층이 정치적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 이전의 관리 등용법과는 달리 모든 선비들에게 출세의 길을 열어 준 획기적인 제도였던 것이다. 특별히 귀족가문이 아니더라도 이제 실력이 있는 자는 누구나 벼슬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살폈듯이 조선 개국의 주도 세력인 신진사대부의 경우 과거는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절실한 제도였다.

한반도에 과거제도가 도입된 시기는 고려 광종 때의 일이지만 정착되고 발달된 것은 조선 개국 이후의 일로 보는 것이 옳다. 아무래도 고려 시기는 지방 호족 세력이 강대했던 귀족들의 나라여서 과거가 중요한 관리 선발 방법이 되지는 못했다. 고려의 건국의 정치적 배경이 지방호족들의 연합이었던 것에서 그 원인을 찾아 볼 수 있다. 통일신라 말에 수도인 경주를 세력 근거지로 삼았던 귀족층에 대항해 지방 호족들이 성장하면서 중앙귀족과 지방호족의 내부 모순이 심화되면서 통일신라는 해체의 길로 들어섰고, 이 혼란기를 수습한 것이 개경의 지방호족 왕건세력이다. 왕건은 당연히 정치적 동지로서 각 지의 지방호족을 규합했다. 따라서 고려시기 내내 지방호족의 권한은 막강했다.

유난히 외침이 잦았던 고려시기의 극동아시아 정세도 과거제도의 정착을 가로막았다. 특히 원나라의 지배기에는 국왕마저 원나라의 외손자여야 하는 등 독립성이 심각하게 위협받던 시기여서 자체적인 관리 선발에도 많은 문제가 야기됐다. 기존의 중앙문벌 귀족세력에 원나라에 빌붙은 부원세력까지 합세해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재지사족(신진사대부의 기반)이 입신양명할 수 있는 길은 지극히 제한됐다. 결국 고려말 중앙귀족과 신진사대부의 모순이 고려의 망국과 신생조선의 개국의 원동력이 됐다.

본 연재에서는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된 조선의 과거와 우리 지역의 급제자 명단을 살펴봄으로써 당시 보령 사회를 이해하기로 했지만 간단하게 고려조의 과거제도를 살펴보자. 참고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제공하는 역대 과거 급제자 명단에는 고려시대 과거 기록도 실려 있다.

고려시대 과거제의 원류는 통일신라 서 682년(신문왕 2년) 국학(國學)을 설립하고, 788년(원성왕 4)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설치되면서이다. 국학은 유교경전을 주로 가르치는 관리 양성의 교육기관으로서 대체로 육두품의 자제들이 입학하였다. 육두품은 골품 귀족과는 반대되는 세력이다. 육두품 세력은 왕권에 비교적 독립적인 골품 귀족 보다 왕권의 지배를 받는 행정적 성격이 강한 관료세력이었다.

이들은 당연히 신분적 권위에 집착하는 골품 귀족에 대항했다. 그러나 골품체제를 고수하려는 귀족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쳐 독서삼품과는 유명무실하게 됐고, 육두품 세력들은 당나라로 유학해 당의 관리가 되는 길을 택하기도 했다. 고려왕조가 왕권강화를 위하여 도입한 과거제는 신라의 육두품 귀족들에게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아니 과거제 도입이 가능했던 것은 육두품 귀족세력의 수 백년 노력이 이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교적 소양을 품부하게 갖춘 육두품 출신 지식인들이 통일신라시대 이래 많이 배출되어 있었기에 과거제를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조는 왕권을 위협하던 호족 출신의 무장들을 대신하여 국왕에 충성을 다하는 문신을 관료기구에 편입시키기 위해 과거제를 실시했다. 과거제의 실시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충성스러운 문신관료들에 의한 문치주의적 사회로 옮아가는 첫발을 내디딘 것을 의미한다.

<자료인용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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