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살 드러낸 잔디 위에 왕 벚꽃이 홀로 의젓이 서 있다.
가녀린 가지로 촘촘한 꽃송이를 애써 받치고 있다.
여름 장마 닮은 봄비를 맞으며 바람에 흔들렸어도 봄 햇살에 은은히 연분홍 제 빛깔을 뽐내고 있다.
연분홍 왕 벚꽃은 내 어머니를 닮았다. 아들 둘은 가슴에 묻으시고 여섯 딸 덕에 분홍빛 한복만 입으셨던 어머니, 첫애를 낳아보면 철이 든다고 했던가?
지금으로부터 9년전 난 엄마가 되었다. 누구나 겪는 산고거니 했는데 정말 끔찍한 아픔이었다. 그 순간 내 어머니를 떠올렸다. 하나 둘도 아니고 자그마치 여덟을 낳으신 내 어머니, 그 때부터 나는 어머니를 한 여자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전쟁과 가난 속에 당신의 청춘은 묻어두고 연명하기에 급급했던 어머니, 남의 집에 가서 품을 팔고 당신 드시라고 주는 밥까지 수건에 싸 가지고 돌아와 주린 허리 붙잡고 자식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셨던 어머니, 입덧을 해 신 것이 먹고 싶어서 식초를 물에 타서 마셨다는 어머니, 심한 입덧으로 아무 것도 넘길 수 없을 때 어머니의 시어머님이 건네주셨다는 담배, 그 때 배운 담배를 여태 끊지 못하시고 아버지와 자식들의 구박에도 놓으실 줄 모르신다.
그렇다. 전쟁으로 인한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극심한 가난과 싸워야 했던 우리들의 어머니다. 배고픔에서 탈출했을 즈음 내 어머니는 노점에 앉아 계셨다. 그래도 좌판을 놓고 항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마늘이며 고춧가루, 참기름, 소금 등을 파시는 어머니께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엄마 100원만’그것이 인사였다.
10년쯤 그 일을 하셨을까? 어머니 엉덩이는 좌판에 늘 앉아 계셔서 그런지 군고구마 껍질 마냥 시커멓게 굳어 버렸다. 또 손가락의 지문은 찾아 볼 길이 없다. 늘 반창고로 싸매고 계셨던 어머니 손, 마늘을 계속 까시니 마늘 독에 지문도 없어진 게다.
그 때에는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공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어머니의 인생은 안중에도 없었다. 좌판에 씌운 포장 걷는 일이라도 도와 드리는 날이면 나는 으레 댓가를 바랐다. 그래도 어머니는 착한 딸, 예쁜 딸이라며 좋아라 웃으셨다.
아마 이맘 때였으리라. 결혼식을 앞두고 적금을 해지하든지 적금대출을 받든지 해야할 어려움이 있었다.
형편에 맞추어 미루어 결혼식을 했더라면 그런 고민은 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터인데 적금을 중도해지 하자니 이자가 너무 아깝고 적금대출을 받자니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할 부모님께 너무 죄송스러웠다.
은행직원의 조언을 듣고 결정하기로 하고 은행으로 갔다.
잠시 후 어머니는 한 손에 지갑을 꼭 쥐시고 은행 안으로 들어오셨다. 버스를 타고 멀미를 하신 걸까? 유난히 검고 초췌해 보였다.
더울리 만무한 3월초였건만 어머니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어머니의 땀방울은 내 가슴에 붉게 매달려있다. 꼼지락 꼼지락 자라 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 눈망울에 어머니가 있다. 꽃이 없어 낭만에 젖지 못했을까? 아닐 게다. 꽃을 바라 볼만한 여유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서른 다섯의 여자의 삶을 같은 심장을 가지고 사셨을 것이다.
매년 이 맘 때가 되면 아쉬움으로 남는 일이 있다. 언제인가부터 내 생일이 되면 날 낳으시고 스스로 탯줄을 끊으시고 미역국도 못 드시고 밭으로 나가셨다는 내 어머니께 미역국 푸짐하게 끓여 드리고 한 이불 속에서 어머니의 체온을 느끼며 한밤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가슴 한쪽에 있었다.
늘 아쉬움으로만 남았던 그 일을 올 해에는 할 수 있을까?
힘주어 치켜 뜬 눈 파아란 하늘만 시리다 나무란다.
<보령도서관 주부문학모임 예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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