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성한 시스템, 대충대충이 대참사 불렀다.
며칠동안 너무 끔직해서, 또 하도 불쌍해서 그리고 화가 나서 잠이 오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몇년 전 육·해·공의 대참사가 연이어 일어나고 인천의 호프집 참사 때도 그랬습니다. 계미년 올해는 제발 그런 참혹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빌고 빌었는데 헛일이 됐습니다. 계미년은 액운이 많은 해여서 비명에 죽는 사람들이 많다더니 정말 이렇게 대참사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숱한 생명이 비명횡사할 때마다 우리 사회는 눈물을 흘리고 반성하고 성금모금에 동정심을 갖고 그리고 얼마 뒤에 감쪽같이 잊어 버린 채 살다가 다시 대형 참사에 넋을 잃곤 합니다.
정부 당국은 재발 방지를 다짐하고 관련기구가 없었다거나 인원타령을 하겠죠. 그러나 당국이 안전규정을 바꾼다, 인화성 재료를 쓰지 못하게 한다는 발표를 그 동안 몇 차례 했는데도 같은 내용의 사고대책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돌아가는 걸까요? 최첨단의 인터넷 강국을 자랑하는 나라에서 가장 후진적인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잇는 현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 세계가 비웃는 바보 같은 짓을 그만 끝장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 백 명의 생명을 앗아간 참사의 근본 원인과 해법을 정확하게 찾아야 합니다. 일부에서는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관련기구가 없었다거나. 관련법과 규정이 미비하거나 인원 타령을 합니다. 그런 면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총리실 산하에는 재난 업무를 총괄하는 안전개선기획단이 가동되어 왔고 각종 재난에 대한 여러 규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번 화재사고가 대참사로 확대된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대구지하철 책임자들이 초기대응을 상식 이하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숱한 소방훈련과 민방위 훈련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 규정조차 지키지 않았습니다. 왜 그들은 기본 운행 규정을 지키지 않았을까요. 이제까지 훈련과정이 형식적으로 대충대충 운영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부실을 점검해 내고 철저하게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고 형식적으로 일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우리사회의 풍토가 이런 참사를 불러 온 것입니다.
그러면 지난 몇 년 동안 대형 참사가 되풀이되고 있는데도 국민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안전관련 기관들은 무엇을 해왔을까요. 그들도 열심히 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대구지하철 참사에서 보듯 소방 및 전기 관련규정이나 환경 조항들은 실제 재난이 발생하였을 때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각 부처들이 복잡하게 개입하고 권한을 틀어쥐고 있을 뿐, 실제상황에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총리실 산하의 안전개선기획단은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제1순위의 가상훈련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은 안전개선기획단이 그동안 어떤 형태를 보여왔던가를 잘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붙들고 있었던 규정들이 현실적으로 맞는지 안 맞는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실제 상황에서 아무 쓸모 없고 현실과 동떨어진 규정들은 비단 안전관련 분야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이번 지하철도 소방 관련 부문은 소방서가, 전기관련부문은 전기안전공사가, 환경관련부문은 환경부가, 지하철운행 관련해서는 대구시가, 지하철건설대책은 건교부가 맡고 있습니다, 지난해 홍수 때 일을 기억해 봅시다, 수마가 할퀴고 간 고통 때문에 몇 개월 동안 전국이 고통스러웠지만 지금 무엇이 변화됐을까요. 하천관리에는 정부의 여러 부처가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현실을 개선시킬 수도 없고 책임지지도 않습니다.
각 부처가 자기 권한을 내놓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안전개선기획단이나 수질개선기획단이 있지만 맨 날 그 타령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관련 공직자들이 현장을 잘 아는 전문직 공무원도 아니기 때문에 현실에 맞게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책상에서 대책을 세워 언론용으로 발표할 뿐입니다. 사실 1, 2년 지나지 않아서 다른 보직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책임 질래야 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총리실 산하에 관련 기구를 여러 개 만들어 놓았지만, 관료들의 자리만 늘려놓았을 뿐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현상은 일부의 분야에서만 벌어지는 일일까요? 아닙니다.
복지분야에도 각 부처들이 끼어들기 시작해서 거의 전 부처로 복지관련 예산항목이 늘어났습니다. 그 예산만 복지예산의 절반에 이르고 있습니다. 복지의 ‘복’자도 모르는 부처들이 종합적인 복지행정의 관점을 가질리 없습니다. 국가의 행정의 모든 분야가 그렇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50여 년 동안 쌓여온 관행과 제도, 규정들을 철저하게 점검해서 오늘의 현실에 맞게 뜯어고치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해 왔습니다(신동아 2002년 10월호 행정쇄신론 게재).
그렇습니다. 신정부가 21세기의 오늘에 맞게 법과 규정들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행정개혁의 효과는 별로일 것입니다. 장애인 관련 규정조차 7개 부처가 따로따로 갖고 있으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기구의 개편과 기능조정, 새로운 인사원칙 등 해야 할 일이 많지만 가장 기초가 되는 작업은 역시 난마처럼 얽혀 있는 관련법과 제도, 규정들을 고치는 것입니다.
재난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교통수단, 건물, 다중집회, 천재지변 등 재난에 관련된 제반 법과 규정을 총괄해서 현장과 현실에 맞는 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전제 위에서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책임지는 안전관리위원회를 조직해서 중앙과 지방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업무를 총괄 기획하고 점검하도록 해야 합니다. 국회는 재난관리청 신설을 그 방안으로 내놓고 있습니다만 저는 반대합니다. 재해대책본부도 있고, 민방위 훈련도 수 십년 해왔고 각 기관에는 비상기획관도 있지 않습니까. 무슨 관료조직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은 관료주의적 사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방서, 건물, 항공기와 선박, 항구 등 해당 제반업무를 각 부처에서 관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재난관리청은 중복행정과 비효율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중소기업청을 만들었고 장관급의 중소기업위원회도 있지만, 중소기업의 아우성은 여전합니다. 재난 관리의 최고전문가를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 조직을 통해 국가적인 재난관리업무를 추진해 가면 됩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에 목숨을 잃은 분들과 그 가족들을 진심으로 위로하며 국가운영의 개선방안을 현실화하는데 힘을 모아 나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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