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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책을 완성한 조현명(1690~1752)
[역사 속 보령인물]-10
2009년 07월 07일 (화) 09:24:00 김종윤 기자 jjong@charmnews.co.kr

   
헌 삿갓 짧은 도롱

-조현명

헌 삿갓 자른 되롱 삽 짚고 호미 메고
논뚝에 물 보리라 밭 기음이 어떻더니
아마도 박장기 보리술이 틈 없는가 하노라

(농번기에 할 일이 많아서 장기 두고 술 마실 겨를이 없음을 노래했다.)

조선 영조 때의 문신이다. 본관은 풍양, 자 치회, 호는 귀록․녹옹, 시호 충효

1713(숙종39년)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71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이 되고, 용강현령, 지평 등을 거쳐 1728(영조4년)년 이인좌의 난 때 도순무사 오명항의 휘하에서 종사관으로 공을 세워 분무공신 3등에 책록되고, 풍원군에 봉해졌다. 그 해 부제학이 되고 의금부동지사, 도승지를 거쳐, 1731년 경상도 관찰사에 올랐다.

이듬해인 1732년 대마도의 화재로 조정에서 쌀을 보내려 하자 반대해 파직됐고, 1733년 전라도 관찰사에 기용된 뒤 총융사, 공조참판을 지냈다. 1736년 이조판서가 되고, 예조판서로 전임해 형정의 불공평을 상소하다가 파직됐으며, 1738년 복직돼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뒤 1740년 우의정에 올랐다.

1742년 양역조정청을 다시 설치하고, 이듬해에는 문안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46년에는 영돈녕부영사로 전임했다가 다시 우의정을 거쳐 1750년 영의정에 올랐다.

노론에 속한 인물이었지만 탕평책을 지지했으며 영조의 장책수행에 적극 협조했고, 청렴한 생활로 일관했다.

붕당을 타파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된다!

1721년(경종 1) 연잉군(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이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격심하게 대립한 신임사화가 일어났다. 이때 그는 겸설서로서 송인명과 함께 세제보호론을 주창, 소론의 핍박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왕세제 보호에 힘썼다.

이후 영조는 왕이 되고 난 후 자신의 인재등용 방식을 헌 재목과 새 재목을 잘 골라서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하기를 좋아했다. 즉 구시대 인물인 당파인이든, 신시대 인물인 탕평인이든 실제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물로 가려 쓴 것이다.

하지만 영조는 실제로 온건파를 주로 등용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소론온건파 조현명이다. 당시 조현명은 탕평파, 반탕평파를 막론하고 그 만큼 현명한 사람은 없다는 평가를 받았고, 후일 반 탕평파에게도 비판을 가장 적게 받은 사람이다. 그는 현실에서는 충돌을 마다않는 원칙론보다 현실적인 차선책이 오히려 현명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없었다면 영조의 탕평책이 유명무실해졌을지 모른다는 평을 받고 있다.

조현명이 주창한 탕평책은 문제를 잘 살펴서 해결할 수 있는 인물을 각 당에서 골고루 등용하는 방안을 내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호대쌍거론’ 이다. ‘호대쌍거론’은 보통 추천하는 3인을 당파별로 올리고 각 부서에서 반드시 다른 당파의 인물이 서로 한 조를 이뤄 업무를 관장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박세채의 탕평론을 계승한 조현명은 모든 당파에 옳은 것과 잘못된 것이 있다는 ‘양시양비론’을 원칙으로 가지고 있었다. 조현명은 이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각자 스스로의 정치원칙을 꾸며내 충신이니 역적이니 하지만 모두 잘못을 범하고 있고 그래서 당쟁은 원칙없는 전쟁이 된지 오래다. 그래서 붕당을 타파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된다”고 역설했다.

이런 상황 돌파를 위해 온건파 위주로 등용하되 그 수단으로 ‘호대쌍거론’을 주장한 것이다. 영조는 그의 이런 주장을 그대로 수용했고. 그 방식은 인사탕평책과 비슷하지만 그것을 제도로서 철저히 규정한 인사안배책이었던 것이다.

또한 각 당파의 정치원칙인 의리에도 문제가 있으므로 절충점을 찾아 타협안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이를 ‘분등론’이라고 한다. 그의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져 기유대처분 이후 국정운영에 본격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노론과 소론의 합의에 의한 탕평정국이 시작될 수 있었다.

1742년 양역사정청을 다시 설치했을 때는 문란한 양역행정의 체계화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 군액 및 군역부담자의 실상을 파악해 이를 1748년 ‘양역실총’으로 간행케 했다. 1750년 영의정에 올랐을 때는 균역법의 재정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재정손실을 보충하는 대책을 마련했다.

그 내용은 군액을 줄이고 진보를 없애며 재용을 절약한다는 것이었으나 왕과 여러 신하들의 반대로 채택되지 못했으며 감필에 따른 재정손실의 책임을 묻는 대사간 민백상의 탄핵을 받아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1751년 좌의정에 전임, 균역청당상으로 박문수와 함께 그 구체적 절목을 결정해 양역의 합리적 개혁을 일궈냈다. 그 후 병을 이유로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해 부친의 묘를 지키다가 죽었다.

그는 조문명·송인명과 함께 영조대 전반기의 완론 세력을 중심으로 한 노·소 탕평을 주도한 정치가였다. 그의 탕평론은 대체로 분등설·양비설·호대설로 정리될 수 있다. 한편 그는 민폐의 근본이 양역에 있음을 지적하고, 군문·군액의 감축, 양역재정의 통일, 어염세의 국고환수, 결포제 실시 등을 그 개선책으로 제시한 경제가이기도 했다.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저서로 ‘귀록집’이 있으며, 편서로 ‘양역실총’이 있다. 묘와 신도비가 성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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