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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광제 선생
[역사 속 보령인물]-1,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2009년 04월 07일 (화) 14:50:22 김종윤 기자 jjong@hanmail.net
   
독립운동가 김광제 선생.
“무릇 신민이 忠(충)으로 행하고 義(의)를 숭상하면 나라는 흥하고 백성은 평안을 누리며, 不忠(불충)하고 不義(불의)하면 나라는 망하고 백성의 멸함은 고금의 역사에 근거함이라...”
-국채보상운동 취지문 중 발췌-

국채보상운동으로 널리 알려진 석람 김광제(金光濟)선생은 1866년(고종3년) 7월1일 보령군 웅천면 평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하고, 188년(고종 25년)에 병조효력부위에 제수돼 통훈대부 훈련원 검정의 관직을 지냈다. 1902년(광무6년) 10월에는 정3품 통정대부를거쳐 호남시찰사 및 동래 경무관을 역임했다.
동래경무관으로 재임하던 1905년 일본은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경성의 치안권을 장악해 조선왕궁마저 일본군이 수비를 맡게되자, 이에 반대해 친일파 탄핵 및 부정부패 일소를 주장하는 사직 상소를 올렸다.

이로 인해 고군산도(현재 새만금방조제 근처)로 유배됐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고, 후에 그의 우국충절이 밝혀져 2개월만에 특별사면 됐다. 이후 대구로 옮긴 선생은 서상돈 선생과 함께 1907년 ‘광문사’라는 인쇄소 겸 출판사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국채보상운동의 시작

그러던 중, 김광제 선생은 서상돈 선생과 함께 일제의 침략상이 노골화되고 국망의 위기가 과다한 국가의 빚, 즉 국채로 인한 것으로 인식을 같이하고 ‘국채보상운동’의 뜻을 갖게 되었다.

1907년 1월 서상돈 선생의 발의와 김광제 선생의 적극 찬동으로 국채보상운동의 횃불을 올렸다. 전 국민이 금연(禁煙)한 의연금 등을 모아 이완용(李完用) 내각이 일본에서 차관한 국채 1,300만원을 상환함으로써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 자주 독립국가를 이루자는 국채보상운동의 물결은 2월부터 전국 각지로 파급되어 한말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김광제 선생은 만주에 일신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하였고, 1920년 제2의 3·1운동을 추진하여 꺾이지 않는 항일의지를 분출하였다. 나아가 조선노동대회라는 노동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민중계몽과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다 1920년에 서거하였다.

국채보상운동 國債報償運動:  1907년(융희 1년) 2월 대구에서 발단된 주권수호운동

1904년의 고문정치이래 일제는 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차관을 도입케 했고, 통감부는 이 차관을 한국민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경찰기구의 확장 등 일제침략을 위한 투자와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시설에 충당했다.

이로 말미암아 1905년 6월에 구채상환 및 세계보충비로 도쿄에서 200만 원의 공채를 모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1907년 한국정부가 짊어진 외채는 총 1,300만 원이나 되었다. 당시 한국정부의 세입액에 비해 세출 부족액은 77만여 원이나 되는 적자예산으로, 거액의 외채상환은 불가능한 처지 였다.

이에 전국민이 주권 수호운동으로 전개한 것이 국채를 상환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취지로 국채보상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의 명칭을 대동광문회라 개칭하는 특별회에서 회원인 김광제,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 참석자 전원의 찬성으로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하면서부터다.

발기인은 김광제를 비롯해 서상돈, 박해령 등 16명으로, 이들은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해 활동을 시작했으며, 전국민의 호응으로 서울에서는 김성희, 유문상 등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설치해 운동을 본격화했으며,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만세보’ 등 각종 신문이 후원해 신문 캠페인을 벌이면서 적극 지원했다.

이 운동이 실시된 이후 4월 말까지 보상금을 의연한 사람은 4만여 명이고 5월까지의 보상금액은 230만원 이상 이었다. 이 운동에는 여성들도 적극 참여하였는데, 당시 사회계층 가운데 최하류층에 속했던 기생들도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 진주애국부인회를 결성하는 등, 서울 ·평양 ·진주 등지에서도 의연금을 모금했다. 그 외에도 여러 형태의 여성 국채보상운동 단체가 설립됐으며 운동의 영향이 일본에까지 파급되어 유학중인 800여 명의 유학생들도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했다.

국채보상운동의 전국적 파급과 성과에 놀란 일제 통감부는 이 운동을 탄압하는 방법으로 대한매일신보사 내의 국채보상기성회 총무인 양기탁을 근거도 없이 국채보상의연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했다가 무죄로 석방하였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국채보상운동은 점차 퇴조되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의 1년간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적 위상을 차지하는 매우 중요한 운동이 되었으며, 우리 역사 5천년에 최초의 국민운동이었다. 국채보상금 처리회(회장 유길준)는 각도 대표자회의를 통해 [의연금으로 장차 교육사업을 하기로 결의]하고 이식을 늘리는 방법으로 한강변의 좋은 농토를 사들이던 중 1910년 8월 29일 한ㆍ일 합방의 국치를 맞았고, 모집한 의연금은 그 후 한국 국민들의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재정적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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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식
2009-04-27 15:59:59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독립지사 감광제선생 추모사업회 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바로가기 ☞ http://www.dongyangja.com/sub/about02.asp
전체기사의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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