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선배작가인 토크빌의 자취를 쫓아 최근 미국을 여행한 베르나르 앙리 레비.

그는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전쟁 저널리스트, 소설가, 영화감독이기도 한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책 『American Vertigo』에 수록된 글 「나의 사랑 시애틀」에서 시애틀의 매력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시애틀에서 가장 멋진 곳, 그것은 바로 이 도시의 입구다.

물론 나는 이 도시를 사랑했다.

만(灣) 쪽으로 활짝 열려 있는 모습이 주는 느낌과 한여름의 열기 아래에서도 느낄 수 있는 이곳의 생기 넘치는 대기의 흐름을 나는 사랑했다. 나는 이곳의 햇살 가득한 섬세한 부두들을 사랑했다. 울긋불긋한 약동하는 시장(市場), 매우 전문화한 서점들, 수집 가치가 있는 포스터들을 진열해둔 가게들, 즐비한 술집들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두 생선 시장 사이에 몰려 있다. 낮에는 마치 거리들을 넓히려는 듯 협만(峽灣)에서 올라오는 미풍이 좋았고, 저녁에는 신기하게도 선창가 어림에서 멈추는 약간 잿빛 기운이 도는 목화 같은 여름 안개가 좋았다. 나는 이 곳의 언덕들과 끝이 없는 계단들, 워싱턴 호수 위에 두둥실 떠 있는 것 같은 다리, 그리고 알래스카나 파나마로 떠나는 배들이 좋았다.

…나는 먼 과거에 미국 역사상 가장 격렬한 아시아인 반대 소요가 벌어졌었으나 오늘날 대만, 홍콩, 서울, 베이징 등지의 두뇌들을 가장 많이 맞이하는 이 도시, 거의 캐나다 도시처럼 되어버린, 아시아화한, 중국화한 이 도시가 좋았다. 미래의 미국 문명이 만들어지는 탈 미국화한 이 도시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유럽적인 도시로 머무르고 있는 게 좋았다.

…한마디로 나는 시애틀의 모든 것이 좋았다. 만약에 나더러 살고 싶은 미국 도시를 하나 고르라고 한다면 미국에서 내가 잃어버린 나의 자취를 재발견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장소를 골라야 한다면 그곳은 바로 시애틀일 것이다.」

내게도 이 도시는 방문하기 오래 전부터 특별한 의미의 도시로 인식되었다.

‘미국인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 1위’, ‘평균 연령 36세로 미국 내 가장 젊은 도시’ 라는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고, 기업체가 떠나버려 과거 잘 나가던 대도시의 공동화 상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는 미국에서, 이 곳만은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 사 ’본사, 꿈의 비행기를 지향하는 ‘보잉 사’, 세계 최대 인터넷 서점 ‘아마존’, 그리고 전 세계인의 커피 입맛을 바꿔버린 ‘스타벅스’ 같은 세계 최대의 기업들이 수없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이 곳에서, 20세기 미국의 막대한 부가 탄생했고, 앞으로 21세기 ‘미래의 부’가 끊임없이 창출될 것으로 예상되는 꿈의 도시임을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만드는 그 곳만의 자유롭고도 독특한 도시 분위기가 예전부터 내게 궁금증을 느끼게 했었다. 그리고 이 도시가 무엇보다도 내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우리 보령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올해 5월, 작년 우리 시를 방문한 쇼어라인 시의 초청으로 우리 시 방문단의 답방이 이루어졌다. 총 18명인 우리 일행들은, 여성 시 의원인 나를 비롯해 시장, 시 의원, 공무원, 교육계 인사, 기업인, 한미친선협회 회원 등 각계각층의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5박 7일의 빡빡한 일정 속에서 자매도시인 쇼어라인 시와 쇼어라인 시민들의 교육, 문화, 직장 등 실질적인 생활 터전인 인근 시애틀 시의 여러 곳을 견학했다. 현지 미국인 공무원들, 교민들과 함께 한 견학을 통해 나는 왜 미국이 선진국이라 불릴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시애틀 지역이 왜 가장 살고 싶어 선망하는 도시인지 그 이유를 가는 곳곳에서 재인식 할 수 있었다.

정치, 교육, 문화 등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여러 분야였지만, 최우선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연과 주변 환경보호 분야였다. 시애틀은 어디를 가나 도시와 주택들이 울창한 수목과 정원들로 둘려 싸여 있다. 사시사철 도시전체에 푸른 상록수가 울창한 이런 자연환경이 저절로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자기 집 정원의 나무라도, 상록수라면 마음대로 베어내지 못하고, 반드시 시의 허락을 받아야만 되는, 엄격한 법과 그것을 지키는 시민의식이 뒷받침 되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처럼 철저한 그들의 친환경적인 자연보호의식을 가는 곳곳에서 엿볼 수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곳은 ‘치텐덴 운하’였다.

시애틀은 호수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크고 작은 호수가 도시 인근에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시애틀 타코마 공항에서 이 도시로 들어올 때, 처음 마주친 장관이 바로 호수 위에 빽빽이 정박해 있는 흰 요트들의 풍경이었다. 시애틀 사람들에게 있어 요트는 자신들의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취미 생활의 일부분이다. 남녀노소 시간만 나면, 각자의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 삶의 여유를 즐긴다. 그런데, 호수에서 바다로 나아가려면 큰 난관을 통과해야만 한다. 내륙의 워싱턴 호수의 수면과 퓨젯 만의 바닷물의 수면높이가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통행이 불가능하다. 이 낙차를 해결하기 위해 1916년 운하를 만들어 통행을 가능하게 했다. 우리나라에도 요즘 올 12월에 대선을 앞두고 있는 한 야당 후보의 최대 선거 공약이 바로 ‘대운하’ 인지라 더욱 관심이 가는 곳이었다.

치텐덴 운하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친환경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호수나 바다에서 운하의 도크에 배가 들어오면, 먼저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지 않게 수문을 닫는다. 그 다음 물을 채워 수면을 높이거나, 반대로 물을 빼서 수면을 낮추어 기존의 호수나 바다의 수면과 높이가 같게 만들어 통행이 가능케 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작동을 순전히 수동식으로 밸브를 여닫는 방식으로 수로관의 수량을 조절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물이 차오르거나 빠질 때 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배 한 척이 바다로 나가는데 20~30분 씩 걸리는 시간이 무척이나 더디게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일부러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친환경적인 옛 방식을 불만 없이 따르고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동안 요트의 사람들은 운하의 작업인부들과 유쾌한 인사와 얘기를 나누거나 자신들의 배를 지켜보고 있는 주변의 관광객들에게도 기꺼이 좋은 구경거리가 되어 주고 있었다. 그런 모습에서 나는 ‘느림의 미학’을 보았다. 운하를 드나드는 요트의 크기도 제 각각이고 타고 있는 사람들의 연령이나 목적지도 다양했다. 인근 해로 나간다는 젊은 연인들의 요트나 가족들의 요트가 있는가 하면, 먼 알래스카로 가서 한달 간 친구들과 머물다 올 것이라는 멋진 은발의 노인들이 타고 있는 요트도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언뜻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떠올랐는데, 은퇴 후의 노년을 여유롭고도 낭만적으로 보내고 있는 그 노인들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그런데 바다로 떠나는 것이 요트와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수문 남쪽에는 물고기들을 위한 통로가 따로 있었다. 인근 호수의 여러 물고기들도 사람들처럼 바다로 나간다. 운 좋게도 우리가 방문한 그 날, 바로 1년 된 어린 연어들이 내륙의 호수에서 바다로 나가는 날이라고 했다. 쏟아지는 수로의 거센 물살 속에서 바다로 나가는 작은 치어들의 모습을 간간히 볼 수가 있었다. 그 동안 평온한 호수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그 치어들은 거친 파도를 가르며 태평양으로 나아간다. 3~4년 동안 전 세계 바다를 떠돌다가 산란 때가 되면 다시 자신의 고향 워싱턴 호수로 회귀한다. 가을 무렵, 그 때가 되면 수로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수많은 연어 떼의 풍경이 장관을 이룬다 한다. 작년에만도 40만 마리의 치어들이 바다로 나갔다. 그러나 모든 연어들이 다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험한 바다의 생활과 포식자들에게 많은 수가 죽음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오늘 바다로 나가는 어린 치어들도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그저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이 시키는 대로 겁 없이 바다로 나아간다. 공연히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자식들을 험한 세상에 떠나보내는 어미 심정이 되어 잠시 마음 한편이 뭉클해졌다.

이렇듯, 치텐덴 운하에서는 인간의 편의를 위해 자연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물고기들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친환경적인 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앞으로 우리 시가 추진해야 할 수 많은 사업들에 있어서 나아갈 바를 곰곰이 생각하게 해 주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두 번째로 인상적인 자연보호 정책은 만년설이 쌓여 있는 레이니어 산 국립공원에서 볼 수 있었다. 울창한 삼나무 숲 지대를 자랑하는 이 곳의 입구에는 가게 겸 캠핑장소가 딱 한곳이었다. (전 영사 출신인 우리 교민이 운영) 그것도 인근 지역 주민의 80%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만 지을 수 있었던, 유일한 시설이라 했다. 우리나라의 유명산 입구의 그 수없이 많은 상점들과 숙박지 들의 소란스런 모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우리와는 달리 자연을 되도록이면 훼손하지 않고 원 상태 그대로 즐기려는 시애틀 시민들의 결정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가 있었다.

 환경 보호가 역시 잘 되어 있는 곳으로는 시애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는 ‘리치몬드 비치 파크’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올림푸스 산이 바라보이는 아름다운 바닷가 공원인 이 곳에는, 상체를 벗은 채 일광욕을 하는 이들도 있고, 한가로이 개를 끌고 산책하거나 공놀이를 하는 젊은이들도 보여, 조용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많은 시민들이 이용하는 바닷가 공원인데도 그 넓은 어느 곳에서도 가게가 하나도 보이지가 않았다. 백사장에서 고기를 구워먹거나 음주에 고성방가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시끄러운 폭죽이나 무질서한 상업시설 같은 것들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여기 저기 백사장에 어지럽게 놓여있는 긴 통나무들의 모습이었다. 우리 시였다면, 왜 빨리 치우지 않느냐고 당장 민원이 생길만한 광경이었다. 그런 궁금증을 마침 동행한 잭슨 여시의원 -그녀는 열렬한 환경 보호자다. - 에게 내가 물었다. “이런 모습을 시민들은 더 좋아한답니다. 산책 나와 걸터앉기도 하고,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광경이라 선호합니다. 그리고 썰물 때 자갈이나 모래가 쓸려나가 유실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부러 치우지 않고 놓아 둔 것입니다.”

나의 통역에 우리 일행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애틀 시민들의 남다른 자연보호의식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시애틀은 항구 도시인만큼 그들은 항만 정비에도 큰 노력을 쏟아 붓고 있었다. 이 곳 여러 부두는 전 세계에서 들어오는 콘테이너들을 연간 400만개나 처리할 정도로 역동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옛날 이곳은 쓰레기 더미가 방치되고 조선소가 있어서 오염이 심각했던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 한다. 이후 시에서는 항구 개선을 위해 2억 5천만 달러 (2500억원)를 들여 새 모래를 가져와 깔고 주변을 정비했다. 지금은 지저분했던 옛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흰 들장미 화단이 아름다운 공원과 청둥오리 떼들이 한가로이 헤엄치며 멋진 스카이 라인을 바라볼 수 있는 관광명소로 새롭게 탈바꿈 했다. 최근 우리 시에도 바닷가 옛 조선소 자리 불법 폐기물 사태가 심각해 민원으로 골치를 앓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더욱 시애틀 시의 이런 노력들에 경탄하게 되고 큰 관심을 가지고 우리 시의 해결 방법도 모색해 보게 된다.

시애틀 항만청 관계자들의 안내로 둘러본 55번 부둣가에서는 시애틀의 상징인 ‘space needle’ 의 멋진 마천루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곳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감동으로 벅차오르는 것은 언젠가 본 영화「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배경이 된 곳이기 때문이다. 그 마천루를 바라보며 나는 레비의 글을 생각했다.

「한 눈에 시애틀의 정수가 확연히 드러나는 순간을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내게는 전혀 새로운 저 짙은 핑크빛 하늘 속, 부동의 두 구름 사이에 횃불처럼 떠 있는 마천루 ‘스페이스 니들’을 보는 순간 일 것이다. 어느 새 불이 환히 밝혀진 이 마천루는 나의 상상 속에서, 미국에 대해 내가 늘 생각해 오던 모든 것을 문득 제시해준다.

시(詩)와 현대성, 기술적 도전과 불안한 그늘, 바벨 신드롬과 뒤엉킨 형태들의 가벼움, 도시의 불빛과 그 지울 수 없는 어둠, 키 큰 가로수들. 어릴 적부터 언제나 나는 ‘마천루’라는 말을 너무나 좋아했다.」

호수와 바다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평화롭게 공존하며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 속에서 ‘빌 게이츠의 아이들’ 군단은 자유롭게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과학계와 문화계의 괴물들이 복잡한 현대성과 고풍스런 습관’을 자연스럽게 결합시키게 된다. 또 미국에서 최초로 남자들이 짧은 스커트(스코틀랜드 식)를 입고 다니는 것이 최근 유행이 되고 있다는, 상식을 깨는 파격적인 개성도 용납하는 열린 도시가 바로 시애틀 인 것이다.

시애틀의 투명한 햇빛과 부드러운 바람을 만나고 온 지금, 나도 역시 레비처럼 어쩔 수 없이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