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의 파업 압박에 밀려 정부의 의료법 개정안이 핵심조항이 빠진 채 국회로 넘어갈 것 같다. 의사들과 한의사들이 반발한 표준진료지침과 유사의료행위제도 조항이 삭제된 것이다. 필자는 애시 당초 정부의 의료법 개정안이 한국사회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개정안이므로 의료관련법안을 전체적으로 수술하여 국민건강증진과 선진화된 질병치료의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정부 의료법 개선안은 이런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어중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료기득권층의 반발로 이마저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면 의사들이 주장하는 표준진료지침 제정은 정말 악법인가? 붕어빵진료를 강요하는 공권력의 횡포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한국의 의료단체들이 부끄러움도 잊은 채 붕어빵 진료라고 떠들고 있는 표준진료지침은 사실 선진국의 경우 예외 없이 전문학회들이 스스로 만들어 의료기술의 보급과 향상에 힘쓰고 있다. 한국에도 많은 의사들의 전문학회가 있지만 이들은 어찌된 셈인지 표준진료지침 작성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고, 극히 일부 학회에서 표준진료지침 논의가 있는데 아무런 구속력이 없다.

그런데 의료현장의 실정은 어떤가. 지난해에 필자는 세 번의 기막힌 경험을 했다. 가까운 분들이 수술하라는 병원측의 권유를 받고 다른 병원이나 한의사에게 진료해서 수술할 필요가 없다는 처방을 받았던 것이다. 환자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필자까지도 어리둥절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한국의 의료현실이다. 사정이 이런데 전문가들이 붕어빵 진료를 강요한다고 떠드는 것은 말이 안된다. 낙후된 의료기술을 언제까지 환자에게 강요할 건가? 신기술을 열심히 습득하여 질병치료에 적극 활용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정부가 부여해 온 의료기득권에 안주하여 수십년 전 학교에게 배운 의료기술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의료계의 풍토는 한심하다.

물론 표준진료지침이 거꾸로 신의료기술의 확산에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신의료기술을 인정하는 위원회를 필자가 복지부에 재직했던 시기에 구성했던 만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신의료기술의 일반화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세계각국은 신의료기술의 일반화, 보편화를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심지어 비방이 많은 중국의 중의학에서까지 비방처방전을 보건당국이 강제로 압수하여 실험을 거친 뒤 전국의 중의계에 보급시키고 있고, 영국의 블레어 정권의 가장 성공적인 개혁으로 표준진료지침 위원회를 조직한 것을 꼽는 이도 있다.

유사의료행위와 관련된 한의계의 반발을 보자. 그동안 정부가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법의료 행위 단속에 손을 놓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예산을 투입해 침, 뜸 등 전통의술에 대한 조사연구와 효과가 입증된 분야의 제도화를 진지하게 추진한 바도 없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갑자기 침, 구의 제도화를 이번 의료법개정안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표를 의식한 제tm쳐가 아니냐는 의구심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정부당국은 예산을 투입해 전통의술의 실태를 조사하고, 갖가지 방법의 효과와 부작용, 약물검사 등의 과정을 거쳐 공론화를 구체화해야 한다.

서양의료의 한계 때문에 서양에서 동양의 각종 전통의술을 도입해 활용하고 있는 마당에 종주국인 나라에서 이를 백안시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WHO도 전통의술의 연구와 활용을 권고하고 있고 값싼 치료방법도 많이 있는 만큼 의료재정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어쨌든 알맹이가 빠진 의료법 개정안이 국회논의과정에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차제에 의료관련법의 개폐가 필요하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이라도 심사평가원의 기능을 강화해 무분별한 수술남용과 오진의 폐해를 줄일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